이 상만 (고양문화재단 총감독, 자유기고자)

역사는 강자의 기록이다.
역사를 영어로는 History 라고 한다.
남성의 역사이다. 왜 남성의 역사인가. 그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무기가 지금 같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전쟁은 몸싸움이 으뜸이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객관적인 검증을 받지 않았고 학문적으도 통쾌하게 정의 내릴 수는 없다. 과거는 남자들이 강했다. 지금은 다르지만…. 그래서 역사는 남성위주의 기록이고 강자의 기록이었다.

History 는 희랍어 Historia에서 온 것쯤으로는 알고 하는 말이다. 독일어의 Geschichte 는 Geschechen(어떤일이 일어났다)에서 나온 말이고 한자의 歷史도 史書(사서)와 歷(역)의 준말인 것을 알고 있다. 독일의 역사철학자 헤겔도 역사 기록의 객관성과 주관성은 배제하지 않았다.

고건 씨가 서울시장으로 재임했을 때 시정자문위원들을 모아놓고 조찬회의를 열었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나는 고건 시장에게 “600년된 도읍의 시장이 되고 싶소? 2000년 옛 도읍의 시장이 되고 싶소?” 라고 물은 적이 있다.  사람들이 조선시대만 생각하면서 당연히 600년 도읍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10년전 정도 600년 사업을 하면서 사람들 뇌리에 굳혀 놓았다. 나 자신도 정도600년 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했던 사람으로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어야만 했다.

정도 600년 사업을 기획할 때 서울시에서 간행한 서울 600년사를 읽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어보면 서울은 600년이 아니고 2000년 전 백제의 도읍이었던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때 하북 위례성과 하남 위례성이 있었는데 그것을 추적하면 서울의 강남 강동 , 송파구와 하남시 일대로 추정되는 하남위례성과 서울 강북과 고양 땅에 하북 위례성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은 2000년 백제도읍이었던 서울시가 쓴 역사책에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고양시는 제대로 된 역사책이 없다. 지금 고양시의 역사를 편찬하고 있어 금년 중에는 간행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역사의 기록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고양시는 대부분의 기록들을 서울 시사에서 따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양” 이라는 이름의 연원은 지금부터 592년 전 조선조 태종 13년에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고양의 역사를 592년 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역사를 현재의 지명과 상황으로만 판단하면 큰 오류가 생긴다. 그래서 서울도 2000년 역사가 600년으로 단축된 것이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2003년 12월 나는 고양문화재단에서 일하기 위해서 공채시험에 응시했다. 그 때 시험 준비를 하기 위해서 고양시의 역사 , 지리 그리고 지금 고양시에 대한 여러 가지 현황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때 30여권의 책을 읽었다. 그런 과정에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고양의 역사는 6000년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6000년 전에 이 곳에 우리 조상들이 정착했다고 하는 증거는 유물 유적에서 온 것이다.

5000년 전 볍씨가 고양 땅에서 발굴되지 않았는가? 이것 하나만 갖고도 통설인, 4338년의 역사를 뒤엎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다.
우리가 지금은 단기도 쓰지 않아 로마역을 쓰고 있다. 기독교 역을 서기라고 쓰고 있다. 그것도 잘못이다. 서기를 우리가 공식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62년 1월 1일부터 이다. 5 · 16 혁명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결의해서 단기를 서기로 바꾼 것이다. 이것도 주권국가로서는 창피한 일이다.

사실상 단기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한 것도 개화기 이후 대한제국이 생긴 뒤 부터였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의 연호(명치 明治, 대정 大正, 소화 昭和)를 썼지만 조선조 600년 기간 동안에는 중국(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썼다.
우리나라의 실제 역사보다 짧게 단기 연호를 쓴 것은 중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단기의
역사는 중국의 요순임금의 역사를 상회하지 못하도록 했다. 지금 고구려의 역사를 없애고 중국 역사속에 우리나라 역사를 포함시키려는 수작과 맥락을 같이한다.
고양시에 강씨들이 조금 살고 있는데 그들의 역사를 보면 5000년 이라고 되어있다. 고대의 신농씨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는 고대역사를 기록한 문헌이 없다. 유일하게 고려시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인데 그 때의 시대상황을 유추할 필요가 있다.
중국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역사를 기록해왔다.
역사는 강자(남성)의 기록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고양시의 역사를 서울 시사에서 찾아 오듯이….

그러나 그 역사를 그대로 차입하면 그것은 고양시의 역사가 못된다. 그것을 우리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역사의 기록은 주관성과 객관성이 공존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역사의 해석에도 소위 중국사를 바탕으로 엮는 측과 한국의 민간 설화를 바탕으로 하는 설과는 자연히 갈등구조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분명한 것은 고양의 역사는 6000년 이다.

지난세기 이후에 일어났던 고양의 역사 변천을 살펴보자. 1914년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행정구역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그 때 고양군은 12개면 155개리로 구성되었고 1936년까지 계속되었다.
1936년 고양군의 용강 , 한지 , 연희 면이 당시 경성부(서울)에 편입되었다. 용강은 지금 마포구이고 한지는 지금의 용산구와 성동구 일부인데 이름조차 없어졌다. 연희면은 글자 그대로 연세대학교의 연희궁이 있던 자리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지역은 마포구 서대문구 로 갈라먹었다.

1936년 서울시에 3개면이 편입되기 직전에 고양군의 인구는 12만 8000명이었다.
그 때 고양군의 위치는 경기도의 중심이었고 고양군의 중심에는 경성부(서울시)가 자리잡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한강은 고양의 강으로 표시되었다.
광나루에서 해포 지금의 행주나루까지 모두 고양군에 속해있었다. 여의도와 밤섬도 고양의 땅이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에 은평 , 뚝도 숭인면이 다시 편입되었고 마지막으로 1973년 신도면 구파발리와 진관 내외리가 서울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고양군은 옛날 땅의 반만 지키게 된 것이다. 즉 벽제 신도 원당 지도 송포 중면등만 남아있었는데 그 중 중면 , 지도면은 현재의 행정 구역 이름에도 남아있지 않다.
서울의 땅 넓이는 약 606㎢데 1914년에는 38㎢였다. 그 중 고양에서 가져간 땅이 176㎢ 서울 땅의 30% , 강북 땅의 59%가 고양땅이었다.
지금 고양 땅은 267.25㎢로서 강북 땅보다 조금 적다.

1914년 고양군 출범시 고양군청은 경기감영자리인 지금의 서대문 적십자병원 터에 있었고 1926년 을지로 6가 지금의 밀리오레 근처에 있었다가 5 · 16 혁명 후 원당면 주교리 지금 자리로 옮겼다. 원래 8도 중에 경기도만은 그대로 경기라 했고 길 도(道)를 붙이지 않았다. 고양은 한성의 직할지역 이었던 것이다.

신라시대는 이 지역을 한산주라 했고 고구려 시대에 달을 성현 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한산은 옛 이름 한메에서 연유되었고 그 뜻은 큰 산 이라는 뜻으로 한메는 산이름이 아니고 고을 이름이었다.(韓山洲)
한메는 백두산의 한발메와도 통하는 이름이다. 한메가 일본 사람들이 잘못 번역해 일산(一山)이 되었다.

지금의 북한산 주봉인 삼각산은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동 산 1-1 번지이고 주봉의 9할이 고양 땅이고 지금의 북한산국립공원도 98%가 고양 땅이었다. 지금은 14%밖에 안 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북한산은 고양의 땅이다.

우리민족의 시원과 깊은 연관이 있는 북한산은 양주와 서울로 땅을 빼앗겼지만 엄연히 그 주봉들은 고양의 땅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우리 민족의 역사 흐름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서울 사람들이 고양사람들에게 땅 빚을 지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참된 역사의 회복운동이 고양 땅에서 용솟음 쳐야 한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