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기획5>

고양시의 하루는 북한산 산등성이 위로 뿜어져 올라와 집집마다 창문마다 쏟아져드는 햇살로 시작된다. 그 햇살에 가려져 잠시 보이지 않는 북한동. 북한산 기슭의 유일한 취락지구인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바로 고양시민들이다.

이들은 아파트지구에 거주하는 시민들에 비하면 까마득한 고참시민들이다. 숙종 37년(1711) 북한산성 축성이래 행궁, 훈련도감, 별관 등에서 일했던 수문장이나 수성군들이 바로 이들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10월 산제를 지내느라 일이 밀렸다는  북한동의 봉종옥 통장(73)은 인구주택총조사 기간을 맞아 호구조사에 바빴다.  봉씨의 설명에 따르면 마을( 6.72km2)에 거주하는 117세대 180명은 대부분 등산객들을 상대로 요식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등산장비 판매업과 굿당으로 대여해주며 사는 집도 몇몇 집이 있다.
옥황상제라는 석상이 서 있는 낡은 집에는 전성평옹(83)이 혼자 살고 있다. 집 주인한테 빚 받으러 1년 전부터 들어와 살고 있다는 그는 아직 빚을 못받았다고 푸념한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북한동으로 들어왔다는  주민자치위원 안익수씨(65, 팔경정 대표), 심을선씨(52, 금북산장 안주인) 등은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인 데다가  먹고 사는데 큰 어려움 없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20여 년 전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심씨는 50대이면서도 30대처럼 보여 젊어 보인다. 

종업원 5명을 두고 팔경정을 운영하는 안씨 부인  최경자씨(58)는 예전에는 부유층들이 주로 산을 많이 찾았다면 지금은 서민들이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요즘 손님들은 예전에 비해 씀씀이가 적다”고 밝힌 그는 그래도 손님이 늘어서 수입은 크게 줄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원효식당’을 운영하는 이제업씨는 북한동에 식당이 들어선 흥미있는 내력을 전해준다.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상원사에서 하루 밤 유숙한 적이 있는데, 이때 먹고 살기 힘들다고 말하는 이곳 주민들에게  “그러면 산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해서 팔면 어떻겠느냐”라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는데 진위는 알길이 없다.

단풍 구경을 하러온 등산객들 틈에 서  멸치, 김, 미역, 수세미, 노가리 등을 잔득 실은 카트를  끌고 행상을 하는 할머니가 시선을 끈다. 운이 좋은 날은 하루 4~5만원어치를 판다는 그는 이름을 묻자 “할망구가 무슨 이름이 있겠냐”며 고개를 흔든다. 글을 못배운 것이 한이라며   “일본 놈의 글은 좀 배웠는데 해방되고 나니 아무짝에도 쓸모 없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북한동의 내력과 옛 풍속도 

북한동 마을의 내력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쪽으로는 서울시 도봉구와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은평구, 남쪽으로는 은평·성북·종로구, 북쪽으로는 고양시 효자동과 맞닿아 있다.
북한산 안에 있다고 해서 북한동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양짓말, 음짓말, 하창, 서문안 등으로 구성돼 있다. 구한말까지만 해도 이 산중에 500가구가 넘는 인구가  거주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도면 북한리가 되었다가 1992년 고양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북한동으로 개칭되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효자동에서 관할하고 있다.

산성을 지키던 병사들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뒤부터는  식솔들과 묵정밭을 일구며 어렵사리 살아야만 했다.  을축년 대홍수 때는 산영루와 무지개다리가 떠내려가고, 산사태로 8부 능선에 있던 북한동 가옥은 물론 농토마저 유실되는 큰 재난을 겪었다.  산사태로  커다란 바위가 굴러내려 계곡의 형태가 바뀔 정도였다.  그때의 인명 피해로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 많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양효석 시의원의 할아버지도 대 홍수때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창릉천에서 변을 당했다.
 
을축년 홍수이후 북한동 사람들은 나무를 해서 팔거나 살구, 자두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제업씨(78, 원효식당 대표)에 의하면 “살구철이 되면 청과상을 하는 업자들이 찾아와 선매를 하는 등 북한산 살구는 유명했다”고 설명했다.
 
효자원까지 지게로 옮겨진 나무는 중개업자들에 의해  영천리(지금의 독립문) 땔감시장으로 운반됐다.  이순원씨(57세, 동일가든 대표)에 따르면 영천리까지 나무를 지고 가는 나무꾼도 있었다고 한다.


산신제를 올리는 사람들 

산에서 태어나 산의 도움으로 산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북한동 주민들은  수백년 전부터 ‘북한산 산신제’를 올리고 있다.

옛 촌락인 의창과 중창에서는 음력 시월 초하룻날 행궁터 부근에서 제를 올렸고, 하창에서는 팔월 초하룻날 노적봉 밑에 있는 훈국 부근에서 지냈다고 한다. 전쟁과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의창과 중창마을이 없어지자 하창에서 받아서 두차례 산제를 지낸다.

팔월에는 소 한마리를 잡아 노적봉 밑에서 지냈으나 그곳에서 등산객이 목을 매 자살한 불길한 일이 발생되어 의상봉 밑 제단으로 옮겨 지내고 있다. 시월에는 돼지 한마리를 제물로 중성문에서 지낸다. 원래 행궁터 옆에서 지냈지만, 6?25때 엄청난 수의 인민군들이 살상당한 곳이어서 옮겨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부정과 불길한 것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에 대해서는 산신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산제의 제관으로 정해진 사람은 이레 전부터 성밖 출입을 삼가는가 하면 숨소리조차 조심했다고 한다. 제물은 결혼한 남자만이 지고 갈 수 있는데 다시 내려가거나 도착하기 전에 내려놓아선 안된다고 한다. 이런 금기는 일제 시대에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

뿐만 아니라 3년에 한번씩 4월에 길일을 받아 인현왕후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는 부왕사 옆 산신각에서 도당굿을 지냈으나  외환위기 이후 비용을 충당할 수 없어 10여 년 동안 못하고 있다고 한다. 봉종옥 통장은 내년에는 시에서 지원을 받아 꼭 치루겠다고 말했다.


최고봉 백운대는
북한동 1번지 
 
북한산의 최고봉 백운대과  인수봉, 만경대 일대의 지번은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1번지에 속해있다. 그런데 고양시민 중 많은 사람들은 북한산이 고양시 산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백운대 인수봉 소재지가 서울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등 삼각산 봉우리는  주능선에서 지선을 타고 북한동 안으로 들어와 있다.
 
신경수씨가 인터넷에 올린 ‘북한산 종주기’ 중에 있는 ‘웃지 못할 실화 한마디’가 북한산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잘 말해 준다.

선생님이 고양시에서 제일 높은 산이 무슨 산이냐고 묻기에 자신의 아들이 벌떡 일어나 “북한산 백운대입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순간 선생님이고 학생이고 모두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들 체면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렇게 가르쳐준 자신의 체면은 또 뭐가 됐겠는가?’라며 쓰디쓴 입맛을 다셨다 한다. 더욱 걸작인 것은 선생님이 ‘고양시에서 제일 높은 산은 행주산성’이라고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신씨는  이를 가리켜 잘못된 정보를 진실이라고 믿는데서 나온 희극적인 비극이라고 꼬집었다. 

정후수 한성대교수(고양시사편찬위원) 는 가끔 고양에서 북한산을 가로질러 한성대까지 출근을 한다. 행위예술가 무세중씨는 북한산을 향해 마련된 제단에 매월 보름마다 제를 오린다. ‘내 속에 산을 얻었으니’를 쓴 신용명씨는 10년 넘게 백수로 지내며 1,200회도 넘게 북한산을 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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