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북한산6 풍수에 따라 글자 좌우를 바꿔 새기기도

(6)북한산 문화재 답사
특별취재팀: 옛날것 그대로
도움준 이:권효숙(고양시사편찬위 연구원) 신용명('내 속에 산을 얻었으니' 저자) 이성희(서정시마을 회장)

‘辛卯 六月十三日 始役 九月初十日 完畢 水口牌將 通德郞 徐尙遠 書記 □□ 片首 金正交 金□□…' 북한산성 공사 내역을 새겨놓은 ‘북한산 수구문 암각자’이다.
'李致復 朴師漢 李弘復 朴師淳 … 禪 …'서암사 아래 눈썹바위에 새겨진 글자들은 선(禪)자로 보아 참선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으로 보인다.

취재진이 찾은 북한산에는 곳곳에 문자들이 나타났다. 바위에 새겨진 암각문은 북한산을 이루는 또 하나의 기록이었다. 시간을 달리해 살았던 사람들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북한산은 옛사람들의 마음과 네트워크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산이었다.

북한산을 1,600여 회나 오른 신용명씨(‘내 속에 산을 얻었으니’의 저자) 와 시인 이성희씨, 북한산 암각문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해오고 있는 권효숙 고양시사편찬위 연구원의 안내와 도움을 받아 취재진은 북한산 문화답사에 나섰다. 일행은 북한산성매표소에서부터 계곡을 타고 올랐다. 전날 밤 비가 내려 바위가 무척 미끄러웠으나 문화답사에 나선 취재진을 북한산은 반갑게 맞아주는 듯 맑고 따뜻한 날씨였다.


북한산 물빛은 매우 투명한 비치색

매표소 위 수구문 바로 위의 ‘소리당’(신용명 씨가 붙인 이름)은 바위로 지붕을 잇고 바위로 벽을 두른 천연암자였다. 신용명씨는 이곳에서 "물이 흐르면서 내는 수백가지 소리를 이곳에서 듣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조금 올라가자 ‘칠유암(七遊岩)’이 새겨진 너른바위가 나온다.권 연구원의 설명으로는 일곱 명의 선비들이 이곳에 왔다는 흔적을 글자로 새긴 것이라고 추측했다.

신용명씨는 두 손에 물을 담아 물에다 하늘을 비춰보고 산빛을 비춰본다. 신씨는 “다른 산들은 비가 오고 난 후 보통 4일에서 1주일 정도 지나야 물이 맑아지지만 북한산은 하루 이틀이면 맑아진다”며 “설악산의 물빛은 옥색이지만 북한산은 그보다 더 투명한 비취색”이라고 말했다.
중성문 앞에는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는 암각이 있다. 권효숙씨는 “또 다른 곳에는 더 심하게 훼손된 곳이 많다”며 “이런 경우는 이름을 새겨놓을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후세 사람들이 지웠거나 6?25 때 소작인들이 지주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 흔적”이라고 한다.


푸른 노을을 본다는 '청하동문'

태고사로 가는 길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오르니 ‘청하동문(靑霞洞門)’이 나타났다. 청하-푸른노을이라는 뜻이다. 신용명씨는 이곳에서 그 노을을 발견했다고 한다. 여름 날 나뭇잎으로 가려진 골에 바람이 한줄기 불면 하늘에서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바로 ‘청하’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찿은 신용명씨도 대단하지만 그렇게 이름 지은 선인들은 더욱 놀라웠다. 청하동문은 ‘백운동문(白雲洞門)’과 마찬가지로 지명을 알려주는 표석이다. 북한산에는 봉우리마다 골마다 이름이 다 붙여있다. 이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산성에서 신속한 군사이동을 위해 상세한 지명을 붙인 것이다.

청하동문에서 조금 더 오르니 ‘최송설당(崔松雪堂)’이라는 암각자가 나타났다. 권 연구원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이조 말과 일제시대에 살았던 여성으로 영친왕의 보모로서 고종으로부터 송설당이란 이름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가문을 일으켜 세운 억척여성으로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가뭄에는 많은 쌀을 궁휼미로 내놓았고 말년에는 재산의 대부분을 육영사업으로 사용했다. 그녀가 남긴 한시와 국문시 등을 모은 '송설당집' 3권이 있다.


산세에 맞춰 글자 좌우가 바뀐 부황사 표석
 
북한산 3대 명당 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부황사지에 있는 부황사(扶皇寺) 표석에는 ‘扶’자가 좌우가 뒤집혀 쓰여 있다. 이를 두고 신용명씨는 풍수지리에 의해 쓰인 글자라고 했다. 표석을 바라보는 좌측에 백운봉이 있어 거기에 맞혀 지아비 부(夫)자를 배치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오른쪽에 내려뻗은 산줄기가 굽어져 부황사터를 감싸안은 모양이어서 손 수(?)변을 오른쪽에 쓴 것이라고 한다.

용학사 아래 화강암 암벽에 있는 승도절목문은 1855년(철종 6)에 새겨진 것이다. 모두 325자로 되어 있는 이 명문의 내용은 19세기 중엽 북한산성 내의 사찰이 피폐하고 승병의 기강이 해이해져 승병대장인 총섭(總攝)이 임용될 때 그 폐단을 없애달라는 내용으로 일종의 대자보였다. 용학사 뒤편 민민한 바위에는 고려시대 때 것으로 추정되는 불화가 새겨져 있는데 고양시에서는 문화재로 지정하려고 하나 절에서 아직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권 연구원은 설명한다.

용학사 아래에는 선정비군이 모여있어 비석거리라 부른다. 총 26기로 이 중 옥개석을 모두 갖춘 것은 몇 기 되지 않으며 훼손된 것이 많다. 비분에 새겨진 기록을 보면 비의 건립 시기는 모두 19세기 이후이다. 이 중 ‘총융사 신공헌 애민선정비(摠戎使 申公櫶 愛民善政碑)’는 1870년 10월에 건립된 것으로 높이 159cm, 폭 35cm, 두께 24cm의 규모이다. 신헌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고, 행주산성 현판을 쓴 사람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인물인데 유독 이 사람의 비가 2기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북한산은 일제 때 독립군 은신처

선정비군 앞에는 고양시가 복원을 추진하고 있는 ‘산영루’의 주춧돌들이 놓여있다. 산영루는 옛모습을 알 수 없었으나 작년에 미술가 홍성호씨가 우연히 고서점에서 구한 사진책자에 산영루 아래에서 일본헌병이 칼을 차고 찍은 사진을 찾아 시사편찬위로 연락해 해 와 그 모습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사진에서 보여주듯이 일제시대 북한산에는 일본헌병들이 주재하고 있었다. 이는 독립군이 북한산에 많이 은신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며 독립군 토벌을 내세운 일본군에 의해 북한산의 많은 사찰들이 불타 없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내려오는 길가 오른편 봉우리는 장군봉이다. 장군봉 이름은 고려말 최영 장군이 이곳에서 이성계 몰래 군사를 훈련시켰던 것에서 유래한다. 고양시 대자동에는 최영 장군묘가 있고 그 뒤편에는 장군의 선친묘도 있다. 권 연구원에 따르면 최영 장군은 고양에서 태어났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후 반군에 의해 고양으로 유배를 오기도 했으며 북한산의 장군봉이 있으니 최영 장군과 고양의 인연은 각별하다고 한다.

비석거리에서 내려와 노적사 입구 조금 못미친 곳에 가로 7m, 세로 5m의 큰 바위에는 '백운동문(白雲洞門)'의 글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이는 성능 스님의 '북한지(1745년 발간)'에도 그 기록을 찾을 수 없어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외에도 북한산성 영역 내에는 ‘괘궁암(卦弓岩)’ ‘불자인명(佛者人名)’ ‘노역각자(努役刻字)’ ‘송자각(宋字刻)’ 등 많은 암각문이 있어 그 의미를 해석해보면 북한산의 역사의 한면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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