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

미국 본토가 공격을 당했다. 건국이래 한번도 침탈을 당해 본 적이 없다던 아메리카합중국의 본토가. 그리고 2만여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합중국의 대통령은 일순 당황해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전쟁중이다” 그리고 나서 또 무엇을 떠올렸는 지 이 전쟁은 아마도 단기전이 아니라 아주 오래 지속될 전쟁이라며 국민들의 인내를 호소했다.

그는 아니 그들은 알아야 한다. 그날 “정치적으로 순진한” 팔레스타인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차마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성을 지르며 춤을 추지는 못했을 지언정, 그 높은 건물들이 무너지는 화면을 보면서 엄청난 인명 피해에 마음 아파할 겨를도 없이, 묘한 쾌감을 느낀 “정치적으로 깨인” 사람들이 지구 곳곳에 수도 없이 있었음을. 그리고 그들 모두가 이슬람인들은 아니었음을.

아니 충분히 영악한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거리로 몰려나와 “기뻐서 길길이 날뛰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모습을 그렇게 반복적으로 화면에 비추어 주었으리라.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말하고 있다. 저들을 보라고. 2만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죽었는데도, 저렇게 좋아하는 것들을. 사탄이 아니고서야 어찌 저럴 수 있는가? 그러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슬픔과 분노보다 쾌감을 먼저 느끼는 그대들, 그대들도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선과 악의 싸움. 이보다 더 명쾌한 슬로건이 어디 있을까?
자 모두들 성전의 깃발아래 모이자.

그들은 걸핏하면 ‘깡패 국가’라는 말을 쓴다. 자국이 다른 국가에게 얼마나 ‘깡패’처럼 보이는 지는 애써 무시한 채.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깡패’이긴 하지만 ‘왕’ 깡패이다. 세상에 필요한 것은 우리를 따르는 똘만이들일 뿐, 다른 조그만 깡패들은 필요치 않다. 세상을 원만하게 돌아가게 하려면 하나의 왕깡패만으로 족하다” 그리고 협박을 해댔다. 이번 사태에 대한 협조 정도가 자국과의 관계를 재는 잣대가 될 것이라고.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기 이전에 모두들 납작 엎드려 버렸으니까. 그들이 ‘깡패 국가’라고 부르는 리비아, 이란, 북한, 쿠바까지도. 그리고 그들이 반세기 전에 은혜를 베풀었던 한 작은 나라에서는 아침에 묵념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고 조기가 계양되었다.

이번 사태 직후, 한 미국인이 그리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너무 슬퍼” 그러자 그 그리스인 친구가 말했다고 한다. “그렇겠구나. 그런데 너희들이 코소보에 폭탄 6개를 떨어뜨렸을 때, 너희들은 아무렇지 않았겠지만, 그곳 사람들은 지금 너희들만큼이나 슬펐단다.”

사태의 본질이자, 해결의 실마리는 이 짧은 대화 안에 모두다 들어있다. 미국인들은 이제서야 슬퍼하지만, 지구촌의 곳곳에서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지금 자신들 이상으로 수도없이 슬퍼했음을. 그리고 그 곳에는 언제나 세계의 경찰 국가라는 미국이 있었음을. 그들이 이 사실을 명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 슬픔의 눈물은 마르기 힘들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는 그들에게도 슬퍼할 일이 더 많이 더 자주 생기리라는 것을. 그곳에 ‘사탄’이 있건 혹은 ‘다른 문명’이 있건.

이번 사태의 본질에 대해 좀 더 깊숙이 생각해보고 싶다면 다소 오렵기는 하지만 <숙명의 트라이앵글>(촘스키/이후)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출판기획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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