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문화제 훼손정책 속설에 반론나와

일반적으로 그동안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서삼릉의 태실이 일제가 아닌 왕가에서 주도적으로 이전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동안 태실은 일제강점기인 지난 1928년께부터 조선왕조의 살림살이를 관장해 오던 이왕직(李王職)이 전국에 흩어져 있던 조선왕조 역대 왕실의 태실을 모으면서 지금의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현재의 태실이 일제의 의해 강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크게 훼손돼 문화적 가치를 상실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근거로 현재 서삼릉의 태실은 옮겨지기 전 조선왕조가 전국 각지에 세원 장엄하고 격조높은 태실의 모습과는 달리 단순하고 볼품없는 모습이라는 점과 태실을 둘러싼 담장이 일본을 상징하는 날일자(日) 모양이라는 점이 근거로 제시됐다.

그러나 이은만 고양향토문화보존회장은 최근 일제강점기인 지난 1920년대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진 태실이 당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태실을 왕가에서 관리할 경제적 여유가 없고 도굴꾼의 도굴로부터 피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이전했다는 주장을 폈다.

이 회장은 “지난 90년대 문화재당국의 대대적인 발굴조사와 잇따른 학술연구에서는 태실이 조선왕조의 주체권을 빼앗긴채 일방적으로 옮겨진 것이라는 그동안의 속설과는 다른 주장과 근거들이 제기됐다”며 “옳바른 역사인식을 위해서라도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태실 설립의 주체를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태실은 출산시 어머니와 자녀 사이에 연결된 생명줄인 탯줄을 모신 유적지이다. 조선조에서는 태를 중요시해 전국의 좋은 자리에 태봉과 태실을 만들고 매우 소중히 관리했다. 서삼릉 태실은 비공개 지역 효릉 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왕의 태실 22위를 비롯하여 공주, 대군의 태실 32위 등 총 54위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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