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국 / 내가 밀어낸 물결 / 세계사

불멸의 밤1

차선을 바꿔 되돌아가야 할 곳이
막막했다 일산 신도시 가는
길, 차선을 잘못 들어
길을 놓치고

김포 매립지로 빠져나가는
길목에서 만난
밤의 주유소,

벌판 끈에도 24시간 편의점은 있었다
그곳에도 불멸의 밤은 당도해 있었다

김포 매립지의 습기찬 바람을 건너온
밤, 밤의 얼굴들이
주유소에 와서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차량들은 황색의 차선을 가로질로
주유소로 들이닥쳤다
기름이 채워지면

후미등의 불빛을 흔들며
깜깜한 벌판 끝으로 사라져갔다
새벽 1시,

밤이 깊어갈수록 주유소는
충혈된 눈빛으로 무엇인가를
힘겹게 견디고 있는 것 같았다

차량들은 앞다퉈 주유소를 떠났지만
주유소는 한밤내
제가 밝힌 불빛에 갇혀 있었다
제 몸의 불빛을 떠날 수 없었다

서대문구 홍은동에 살고 있는 시인 오정국 씨가 문명과 도시적 삶의 대변지인 일산신도시를 방문했다. 시인의 눈엔 신도시는 범상치 않은 도시였다. 근대적 삶을 털어 내고 근대 이후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곳곳으로 뻗은 도로는 시인과 신도시를 어긋나게 했다. 길을 잘못 들었다. 시인은 ‘차선을 돌려 되돌아가야 할 곳’을 몰라 막막해 했다. 당당한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 찾아 나선 곳이지만 ‘일산신도시 가는 길, 차선을 잘못 들어’ 오히려 그들의 삶의 폐기물이 쌓여 있는 김포매립지로 접어들었다.

중년의 나이에 퇴출 당한 이들의 심정을 안고 찾은 곳이 일산신도시였으나 그만 당도한 곳은 자신과 같은 처지들이 몰려들고 있는 매립지. 그러나 그곳에도 ‘24시간 편의점’은 있었다. 이미 ‘불멸의 밤’은 당도해 있었다.

쫓겨난 벌판 끝에 주유소로 서있는 자신에게 ‘매립지의 습기찬 바람을 건너온 밤의 얼굴들’도 ‘주유소에 와서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아직도 건재를 과시하는 차들은 지켜져 오던 시대의 금기 부수고는 ‘황색의 차선을 가로질러 주유소로 들이닥쳐’ 쫓겨난 이에게 그나마 남아있는 ‘기름’을 빼먹고 ‘후미등의 불빛을 흔들며 벌판 끝으로 사라져갔다.’

퇴출된 중년들은 ‘밤이 깊어갈수록’ 자신들을 찾아줄 무엇인가를 ‘충혈된 눈빛으로 힘겹게’ 견디고 있지만 ‘제가 밝힌 불빛에 갇혔’고 ‘제 몸의 불빛을’ 떠나지 못했다.

오정국(46) 시인의 세번째 시집 ‘내가 밀어낸 물결(세계사)’에 수록된 시다. 시인은 시집을 통해 한국의 중년이면 누구나 품고 있는 ‘퇴출’을 이야기한다.

한국의 중년들은 ‘창 밖의 빗방울을 보면, 그만둔 회사의 전자우편함으로 보내진 e-mail들이 못견디게 궁금했다. 나는 그 e-mail을 열어볼 수 없었다’(시 ‘뿌리뽑히지 못한 나무들은’ 중에서). 사회생활에서는 뿌리뽑혔지만, 삶에서는 끝내 뿌리뽑힐 수 없는 삶 자체의 비극성을 시인은 구체적인 사연을 통해 가슴 아프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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