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성옥 / 양성평등연구소 연구원

완전한 성평등 만들기 작은 편견 뒤집기부터

한국사회는 현재 양성평등한 사회일까? 이제는 ‘그렇다’ 와 ‘아니다’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닌 듯 하다.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양성평등’ 주제와 관련한 의견을 대략 분류해보면, “양성평등 아직 멀었다!”라고 생각하는 ‘요원형’이 있는가 하면 “잘 모르겠다. 관심없다”의 ‘무관심형’이 있고 “이 정도면 훌륭하다. 오히려 남자들이 차별을 받고 있다”는 ‘역차별주의형’이 있다. 물론 위의 의견 사이사이에 자신의 의견을 위치지우는 사람들도 많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양성평등’은 여성만을 위한 정책이나 가치관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는 70~80년대의 ‘여성해방’ 세대를 지나고 90년대의 ‘여성평등’을 지나면서 새로운 21세기는 ‘양성평등’ 또는 ‘성평등’이라 명명하고 위치 지워지는 역사를 갖고 있다. 비단 이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름이 함축하는 의미의 문제이다.

‘여성해방’의 전제는 억압자를 남성으로 억압받는 대상을 여성으로 보는 것이며 투쟁의 문제를 포함하는 의미이다. ‘여성평등’은 그에 비해 조금은 덜 투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남성들이 처한 위치와 동등하게 여성들도 그런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에 비해 ‘양성평등’은 역차별의 논리도 수용한 의미로 볼 수 있다. 남성들과 여성들 모두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최근에는 두 개의 성(양성 兩性) 만이 평등의 대상은 아니며, ‘제3의 성(性)’도 평등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로 ‘성평등(性平等)’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서양의 성평등 역사에 비해 우리는 또한번, 동이족의 특성을 살려 빠른 시간에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압축적이고 빠른 시간에 남들이 이루어 놓은 역사를 이룬 경험이 있는데 그것이 ‘민주주의’의 역사이다. 성평등의 발전 또한 이와 비슷하다. 한국사회의 ‘성평등’에 관한 현 주소는 ‘국가주도형’이며 따라서 여성정책은 가히 선진국형이라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다. 물론 국가주도형이 되기까지 여성시민운동이 그 기초를 다졌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국가주도형 ‘Top Down'방식의 한계이다. 국가나 국가정책이 개인의 의식까지 담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 정책은 앞서가고 있으나 그 정책의 대상인 국민들이 진정한 성평등 의식을 가지고 행동 변화를 일으키고 있느냐? 의 문제이다. 의식 변화에 대한 측정은 현상의 변화나 행동 변화의 결과로 가늠해 볼 수 있다. 결국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개개인의 변화를 유도할 사회문화적 변화가 수반될 때에 목표달성이 쉽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일환으로 아래와 같은 기준을 각자에게 제시해 보자. 각자가 답을 하다보면 나의 성평등의식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고 그 가늠의 결과가 바로 “한국사회는 현재 성평등한 사회일까”에 대한 각자가 정의하는 하나의 답일 수 있다.
- 우리 집은 맞벌이 집안이다. 그리고 승용차가 한 대 있다. 아내(또는 남편)와 나 중에 누가 차를 몰고 다녀야 평등하고 합리적인 선택일까?

- 기혼여성인 듯한 여성이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을 볼 때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 여성의 남편도 당연히 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한 가정에서 여성(아내)은 남성(남편)에 비해 항상 지위가 낮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나의 의식태도)    

-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여름 대낮이다. 나(남성)는 후끈한 열기가 푹푹 올라오는 아스팔트 길을 걷고 있다. 옆에 한 여성이 꽃무늬가 화려한 양산을 쓰고 가고 있다. 그 여성이 무지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뭣 땜에 나(남성)는 그 부러운 양산을 쓰지 못하는 걸까? 혹시 꽃무늬 없는 남성용 양산이 나오기를 기다리는가? 양산에 왜 남성용과 여성용이 필요한가? 햇볕만 가리면 되는 건 아닌가?

- 어쩌다 용기 있는 남성이 꽃무늬 양산을 쓰고 가고 있다. 나는 자꾸만 흘끔흘끔 쳐다보게 되는가?

- 여학생들은 왜 학교에서 바지교복과 치마교복을 선택해서 입을 수 있다고 하는데도 99%의 여학생이 활동하기에 불편한 치마를 선택하는가? 그 선택의 기준이, ‘예쁘니까’ 또는 ‘남들 다 치마 입는데 튀기 싫어서’라고 답한다면 나는 어떻게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가? 

완전한 성평등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전에 가까운 성평등 세상은 나의 작은 편견과 상식을 뒤집어보면서 시작되고 완결된다고 필자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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