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의 외손 이숙균(李淑均) 묘(墓)

▲ 철거가 진행중인 산자락에서 식사동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숙균의 묘. 고구려 적석총에서부터 내려오는 장방형 분묘로, 고려시대 무덤양식이 면면히 이어진 드물게 보는 묘제다. 사진 왼쪽은 후손 이병준 회장(성균관 유도회 도봉구지부).

#사례 1.
행신동의 무원마을 공원 내 야트막한 언덕위에는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 장군 막장으로 활동하고 후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유형장군 묘가 있다. 길 건너편 진주 유씨 묘역과 함께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인근지역 전체가 유씨 문중의 선산이었다.
경기도 기념물 제50호로 지정돼 있고 유형장군의 업적이 비교적 역사서에 소상히 밝혀져 있어 무원마을 아파트 단지 건설과정에서도 이장하지 않고 묘역을 공원으로 조성한 훌륭한 사례다.

#사례 2.
재개발예정지구로 이미 철거가 시작되고 있는 식사동 고양가구공단 끝에 위치한 산자락에는 홀로 남아 철거가 진행 중인 식사동을 내려다보고 있는 묘가 있다. 세종(世宗) 8년(1426)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부임해 백성을 위한 탁월한 정치를 했으며, 여가를 이용해 군민(郡民)에게 무기(武器)와 기술(技術) 및 인재양성(人才養成)에 주력했던 이숙균(李淑均)의 묘다.
이숙균의 자(字)는 균평(均平)으로 1396년 도체찰사로 왜구의 소굴인 일본의 이키섬(壹岐島)과 대마도를 정벌했던 익평공(翼平公) 무(茂)의 손자로 단양(丹陽)이 본관이다. 또한 어머니가 공양왕의 딸이니 이숙균은 공양왕의 외손이 된다. 1448년 강릉부사로 임명받았으나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이에 세종대왕이 그의 치적을 기려 가선대부한성판윤으로 추증하고 예장토록 했다.
이 묘에 대해 현재 고양시에서는 보존을 할 것인가, 이장을 요구할 것인가를 놓고 심의 중이라 한다.


이 지역은 건교부가 택지개발예정지구로 개발하고 있는 풍동2지구로 풍동·식사동 일대 96만6000㎡(29만2000평) 규모로 개발 예정이며 주택건설계획은 단독주택 290호, 공동주택 4890호(국민임대 1960호, 장기임대 2700호 포함)로 총 5180호의 주택을 건설, 1만5540명의 인구를 수용할 계획이다. 2010년부터 주택건설 사업계획 승인 절차를 거쳐 2013년 입주가 시작될 예정이라 한다. -고양신문 2007년 4월 10일자

현대사회에서 대규모 주거지 개발은 주변 지세에 순응하며 조화를 이루는 전통마을 조성과 달리 현대식 기계장비와 철근콘크리트 등의 건축 재료를 사용해 자연지세를 없애고 상전벽해와 같이 새롭게 건설하는 식인데, 식사동의 경우에도 이런 건축공법이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기자가 둘러 본 현장은 이미 많은 철거가 이루어진 상태며 특별히 보존가치가 뛰어난 건축물이나 유산이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사후(死後) 가선대부와 한성판윤의 직책으로 추증된 이숙균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여타 역사서에서 그 활동 내용의 기록을 찾기는 어렵지만 묘제 양식과 지금도 고양시에서 거주하고 있는 후손들의 보존하고자 하는 희망적인 기대에 부응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29만평이라는 대규모 부지에, 전국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없는 이 무덤을 지역의 문화유산으로서 보존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아파트 단지 뒤편 야산의 경사를 끼고 산책로와 공원을 조성한다면 생활 속의 유산으로 더욱 가치 있을 것이다.

아들에 효험? 코 없어진 석인상

이 무덤은 좌대가 지세에 순응해 한강 방향을 바라보는 서향이며 고구려 적석총에서부터 내려오는 장방형 분묘로, 고려시대 무덤양식이 조선전기까지 사대부가에 그 유풍이 면면히 이어지는, 드물게 보는 묘제다. 장방형 무덤은 봉분 주위를 호석이라는 돌로 둘러 사각 형태로 만든 방형 묘로 조선시대 원형형태의 무덤이 대부분인 고양시에서는 매우 드문 유형이며 대자동에 있는 최영장군 묘와 형태적인 유사점이 있다.
무덤 양쪽에 석인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왼편의 석인상은 아마 인근 주민들에게 아들을 낳게 해주는 효험이 있다고 믿는 민간신앙의 영향인지 코가 닳아 없어졌으며 최근에 세운 비가 왼편에, 보다 오래된 비가 오른편에 있고, 무덤 조성 때부터 있었음직한 상석이 소박하게 그 앞에 자리하고 있다. 이 묘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고려 말, 조선 초 무덤 양식을 잘 보여 주는 문화재라 할 수 있다.

고양시는 왕릉을 비롯한 무덤이 전체 문화유적의 80% 이상을 점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풍부한 역사를 전해주고 있으며 또한 이는 역설적으로 고양의 역사라 할 것이다.
그 많은 무덤들이 대부분 수도 한양과 가까운 지리적인 관계로 왕릉과 여타 왕족, 그리고 조선의 풍부한 기록문화에서 국가경영에 보다 이바지한 분들 위주로 보존되고 있지만 일제시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급격한 산업사회로 진입한 한국의 근대화 물결이 뒤섞여 오래된 살림집, 사찰, 향교 등 건축물을 비롯한 유무형의 자산이 부족한 편이다. 그나마 195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친 한국의 급격한 산업사회의 유물과 유산도 이러한 대규모 개발로 사라지고 있어 향후 50년, 또는 100년 후에는 우리의 삶이 남아있지 않은 단절된 유산의 기록을 후대에 물려주어야 하는 상황이다.

삭막한 아파트 단지와 인공으로 조성된 공원에 예부터 물려 내려오는 하나의 문화유산은 설혹 그것이 권율장군과 같은 눈에 보이는 커다란 업적은 아닐지라도 그 장소에서는 거기 있음으로 인해 그 의미가 후대에 더욱 빛날 것이다.
취재·사진 김한담 전문기자(전통예술문화원 하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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