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경 / 강촌수필 회원

일상 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를 모아 처리하기 위한 중간적 도구가 휴지통이다. 그래서 휴지통은 가정이나 거리 혹은 공원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놓여있다. 그러고 보면 휴지통은 수많은 동물 중에 인간만이 활용하는 지혜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런 휴지통이 우리 사회에서 자리를 잃고 점차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왜냐하면 휴지통이 없으면 쓰레기를 버리지 않아 쓰레기가 줄어들 것이란 제도권의 단편적 계산 때문다.
그래서 이제 공원에도 거리에도 휴지통을 찾기가 만만치 않다. 그나마 있는 휴지통은 쓰레기가 넘쳐 그 주변이 말이 아니다. 쓰레기의 양에 비해서 휴지통이 적고 자주 비우지 않은 탓이다.

휴지통을 줄여 쓰레기를 치우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것과 휴지통을 늘려 쓰레기로 인한 시민의 불편을 줄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합리적인 것일까. 휴지통을 많이 만들어 놓으면 사회적 비용은 늘겠지만, 시민은 그 만큼 편리해지므로 삶의 질이 풍요로워진다. 더구나 시민은 세금을 내는 만큼 쓰레기를 버릴 권리가 있고, 정부는 시민이 되도록 손쉽게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할 의무가 있다. 때문에 휴지통를 적재적소에 만들어 청결하게 관리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분명 합리적이고 당위성을 갖는다.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특히 질서가 많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 질서를 위해 자율과 규제가 서로 상충하기도 한다. 자율과 규제는 공존 할 수밖에 없지만 자율의 폭을 규제에 비해서 넓혀 가는 것은 자유 민주 시민의 희망이기에 선진국일수록 이를 위해 제도적으로 시민의식을 향상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규제적 방법만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심지어 규제를 넘어서 시민의 준법 정신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억제의 방법만이 난무하고 있다. 도로나 공원의 곳곳에 펜스를 설치한다거나, 속도 제한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 과속 방지턱을 간선 도로에 수 없이 만드는 억제 방법을 쓰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과속 방지턱은 산업 사회의 원활한 물류 흐름을 방해하고, 돌발적으로 운전사 혹은 차량과 상품에 충격을 주어 많은 개인에게 피해를 끼친다. 또한 방지턱 때문에 멈추어 출발하므로 국가적으로 막대한 에너지 낭비를 하고, 휴지통 철거와 마찬가지로 시민의식을 ‘자율’에서 ‘타율’로 퇴보시키는 후진적 규제의 대표적 사례다.

쓰레기는 휴지통이 있든 없든 발생하는 총량은 마찬가지다. 어차피 발생하는 쓰레기를 쉽게 버릴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하고, 그렇게 모아진 쓰레기를 수거해서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제도권의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시민은 쓰레기를 버릴 곳이 없어 버리기 위해 제도권의 눈치를 살피고, 제도권은 이들 시민을 감시하는 서로 간의 적대적 입장은 분명 모순이다. 자율이 확대 될 수 있는 선진적 사회를 위해서 합리적 제도가 실현되는 성숙한 제도권이 너무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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