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의 근본은 다양성” 인구 250명의 지방정부도

▲ 노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들의 본회의장과 한 하원의원의 책상. 흰색과 빨강, 황금색으로 꾸며진 권위적 상원과 달리 하원 회의장은 한결 친화적이었다. 하원 의원들의 책상 위에는 가족 사진과 아이가 그린 그림, 군것질 거리들이 가득했다.

미국은 ‘도시정치의 실험실’ 혹은 ‘지방자치 제도의 백화점’으로 불린다. 각 주마다 다른 지방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800만 명부터 250명까지 규모도 다양하기 때문에 복잡한 만큼 자치의 본질인 다양성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주에는 마지막으로 미국의 지방자치를 살펴본다.
/강희정 편집인 chesarae@mygoyang.com

뷰포트 카운티(Beaufort County)의 지방정부 방문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워싱턴 데일리뉴스(Washington Daily News)를 방문했을 때 연수단을 인솔했던 장호순 교수(순천향대)는 마이클 바스 고문 편집국장에게 정부 방문을 긴급 제안했다.

폴 그레이슨 매니저는 연수단을 환대하며 즉석에서 미국의 지방자치 제도에 대한 강연을 해줬다. 일률적으로 기관대립형의 강(强)시장-의회형의 정부유형을 채택하고 있는 우리에게 ‘매니저’는 호칭부터 낯설 수밖에 없었다. 미국 지방정부의 유형은 일반적으로 시장-의회형(Mayor-Council Form), 의회-매니저형(Council-Manager Form), 위원회형(Commission Form), 주민총회형(Town Meeting) 등으로 분류된다.

이중 뷰포트 카운티는 의회-매니저형 정부형태를 채택하고 있었다. 7명의 의원이 하부에 전문 경영인을 고용해 정부를 운용하는 방식이다. 매니저 임기는 평균 4년으로 의회가 매니저 해임권을 가지고 있다. 매니저는 최소 석사 이상으로, MBA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폴 그레이슨 매니저는 “유럽에서 초기 정착민이 살았던 노스캐롤라이나주는 지방정부 중에서도 강력한 편”이라며 “위원회는 선출직이지만 매니저는 고용직으로 객관적 행정을 처리하는 업무를 맡는다”고 설명했다.

업무를 잘못 처리해 해임되는 경우도 많지만 위원회의 정치적 성격에 좌우되는 경우가 더 많다. 폴 그레이슨 매니저는 “개인적으로 훌륭한 매니저는 보수와 진보 위원 모두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편향되거나 저울질하면 해고되기 쉽다”고 말했다. 매니저 평균 나이는 40∼45세. 드물게는 29살에도 매니저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한 곳에서 20년 이상 일하는 경우는 드물고 계약기간이 다 되거나 해고되면 지역을 옮겨 새로 취업하는 방식을 취한다. 매니저에게 정책을 결정할 권한은 전혀 없다. 간혹 의견을 제시할 수 있지만 폴 그레이슨 매니저는 “위원들이 의견을 물을 때만”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그는 한국에서는 시장이나 군수를 100% 선거를 통해 뽑는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도 “강력한 시장 제도는 행정 전문성이 떨어지고 중요한 문제를 정치적 판단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의회는 저녁에 … 케이블TV로 생중계

 

▲ 뷰포트 카운티(Beaufort County)의 폴 그레이슨 매니저가 연수단에게 미국의 다양한 지방정부에 대해 즉석 강연을 했다. 규모와 방식의 다양성은 그야말로 ‘자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미국 지방정부의 계층구조는 일반적으로 주 정부-카운티(County)-도시정부(Municipality), 또는 주 정부-카운티-타운(town) 및 타운십(township)으로 구별한다. 주에 따라 카운티가 없는 지역도 있고 도시정부와 카운티가 대등한 관계에 있는 지역도 있다.
뷰포트 카운티 지방정부 하부에는 7개의 도시정부(시티)가 있다. 카운티 위원은 정당에 소속되어 있지만 시티 위원은 정당과는 무관하다. 뷰포트 카운티 7명의 위원 중 4명은 공화당, 3명은 민주당 소속이라고 한다.

카운티와 시티의 일은 분명하게 구분돼 있었는데 카운티는 △교육 △사회복지(저소득층 푸드 쿠폰, 식량교환권 등) △치안 △보건(유행병, 전염병) △새로운 건물에 대한 감리 감독(안전법규는 주 정부가 만들고 카운티에서는 점검 담당) 등 대인 서비스 중심의, 정치적 태도에 따라 정책이 달라질 수 있는 일을 맡고 시티는 수도, 저수지, 하수도, 화재 등 물적, 시설 관련 서비스로 정치적 태도와는 전혀 무관한 일을 나눠 처리하고 있었다.

이곳 역시 정보공개법, 회의공개법(Open record law, Open meeting law)에 의거해 대부분의 정보는 공개한다. 위원회 철학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이곳에서는 공개된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보는 최대한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공무원 인사에 관한 회의를 빼고는 공무원들의 메일까지 속속들이 공개한다.

미국에서 회의를 지역 케이블TV를 통해 공개하는 것은 관행이다. 위원들이 비상근직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주민들의 참여를 위해 회의는 오후 7∼8시에 열린다. 뷰포트 카운티를 방문한 날 밤, 케이블TV를 통해 교육위원회의 회의를 볼 수 있었는데 위원들은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의견을 주고받았고 주민이 발언권을 얻어 질문을 하면 위원들이 즉석에서 답변을 하기도 했다. 위원회에서는 초등학교의 등교시간을 몇 시로 할 것인가를 놓고 격론을 벌이기도 한다.

대부분 맞벌이 부부이기 때문에 자녀의 등교시간이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참여해 다수결로 결정한다고 한다. 2000명 남짓한 작은 지방정부 주민들이 직접 법을 만드는, 말 그대로의 자치를 실현하는 모습도 미국에서는 흔한 일이다. 어떤 곳은 아예 간판을 달 수 없도록 헌장을 만들어 맥도널드도 어김없이 거대한 아치형의 간판을 달지 못한 채 영업을 한다고 한다.

판공비, 정보비 항목은 꿈도 못꿔

이번 연수를 통해 미국의 지방자치제도는 주민자치의 전통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앙정부의 계획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필요에 따라 정부를 만들어 가는 주민자치의 전통은 미국의 역사성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1620년 정치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 102명의 영국 필그림들은 배 위에서 메이플라워 협약을 문서로 작성했다. 이 협약은 정부와 법은 투표로 국민이 선택하고 다수결의 결정을 받아들인다는 두 가지 중요한 원칙에 합의하는 것이었다.

 

▲ 미국의 의회는 모두 TV로 생중계되고 못 본 사람을 위해 저녁 시간대에 2, 3번 재방송된다. 주민들의 참여를 위해 저녁 시간에 회의가 소집되고 주민들은 즉석에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
노스캐롤라이나주를 비롯한 동북부의 6개 주는 이러한 전통 속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자치적 삶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모든 주민이 한자리에 모여 주민총회를 통해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 형태를 유지했고 따라서 주민에 의한 강력한 자치가 시행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전통 탓에 미국에서는 의회가 중심이 되어 주민들과 협의하며 지역 실정에 적합한 정부 유형을 스스로 채택하며 운영하는 것이다.

미국 지방자치의 가장 큰 특징은 의회가 행정부의 최고 책임자인 단체장을 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방정부의 80%가 의회의 수장이 행정부의 단체장을 겸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국의 의회 우월적인 사고는 과거 식민지 시절 ‘대표 없이 과세 없다’며 독립전쟁을 수행할 때부터 굳어진 것이다. 지방정부의 주인은 의회이며 행정부는 단지 의회가 결정한 정책과 예산으로 행정을 꾸려 가는 집행기관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와 같이 위로부터의 자치 제도가 수행된 곳과는 역사성과 문화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공무수행과 예산 집행은 매우 엄격하다. 97년도 저지 시티와 자매결연을 맺은 우리나라 자치단체장의 방문 일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 쪽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정 중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저지 시티는 이 문제로 우리나라의 의전을 여기저기 확인하는 해프닝을 벌여야 했다. 그곳에는 공식적인 회의에 들어가는 간단한 다과비 정도만 있을 뿐 지방정부 예산으로 오찬과 접대를 하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점심식사비를 마련해 점심식사를 하게 됐는데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맥주를 한 잔씩 주문하자 저지 시티 관계자들이 또 눈에 띄게 당황했다. 식사는 공식적으로 마련했지만 음주는 향응에 해당하기 때문에 만약 언론기관에서 본다면 주민이 낸 세금으로 시장이 술을 마신다고 나올 것이 뻔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와 같은 접대 문화가 전혀 없기 때문에 생긴 일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세금을 판공비, 정보비와 같은 예산으로 사용하는 것을 주민들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의원들은 대부분 인구 5만 이하의 작은 도시에서는 무보수 또는 교통비 정도를 받고 중급 도시에서는 하위직 공무원의 봉급 수준으로 지급 받는다. 그러나 우리처럼 도시 인구가 면적에 비례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정부의 전통과 주민과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연신 비도덕적인 의원들이 뉴스가 고양시 울타리를 넘어 전국을 흔들고 있다. 이러한 마당에 고양시의회도 의원들의 내년 연봉을 현재 3700만원보다 36% 높은 5000만원 선으로 조율하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고 한다.

미국인들 부정과 비리가 없을까. 그러나 비리를 저지르면 그들은 그 자체로, 또 하나는 그 지방정부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것으로 두 번의 책임 추궁을 받는다. 우리는 여기에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지방자치의 싹을 훼손했다는 책임까지 물어야 할 것이다. 명예회복을 위한 그 어떠한 시도도 시원하게 하지 못하는 의회에서 “연봉이 적어도 부단체장급은 돼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누가 들어도 비웃음거리가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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