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선구 | 옥산서예문화원 원장

경건함과 즐거움이 어우러졌던 미풍양속
속도와 경쟁에 밀려 아스라한 추억이 돼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설날에 대해 “아침 일찍 제물을 사당에 진설(陳設)하고 제사를 지낸다. 이것을 정조차례라 하고 남녀 어린이들이 새 옷으로 갈아입는데 이것을 설빔이라 하며 차례(茶禮)가 끝나면 연세가 많은 집안 어른들께 새해인사를 드린다. 이를 세배라 한다.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는 것을 세찬이라 하고 이때 내는 술을 세주라 한다. 각자 처지와 환경에 따라 알맞은 축의의 말로 새해인사로 서로 복을 빌어주는 덕담을 나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설날 때 어른들께서 하시는 말씀이 “설날에는 꼭 떡국을 먹어야 한살 더 먹는 거다”라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한 살 먹는 게 즐거웠다. 그리고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라는 윤극영 선생의 경쾌한 동요도 불렀다. 설날하면 떠오르는 풍경들은 초등학교 어린 시절 고향이야기를 빼면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60년대 초, 고향집에는 설날 명절이 언제나 즐겁고 들뜬 분위기였다. 고향집 주위에는 일가친척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으로 그 중에서도 우리 집은 문중에서 종가였다. 때문에 섣달 그믐날에는 늘 부산했고, 형제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니 시끌벅적 할 수밖에 없었다.
제일 바쁘신 분은 어머니였고 부엌에서 어머니를 도와주시는 분들은 작은 어머니, 고모, 당숙모, 친척아주머니들이었다. 일가에서 오셔서 일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요즘은 떡도 방앗간에 주문만 하면 다 만들어 주고, 그도 아니면 떡집에서 그냥 사면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자급자족하던 시절이라, 맷돌에 갈고, 키로 까불고 채로 치고, 문지르고, 비비고, 손수 그 모든 작업을 준비해야만 했던 때라 늘 잔손질이 많았다. 그러나 그 만큼 노고가 많으니 정성스러움이 더해진다. 인절미를 만들려면 찐쌀을 절구에 넣어 찧는데 일하시는 아저씨께 “저도 한번 해 볼래요”라고 사정하면 힘을 못 쓰고 절구 공이를 들고 어른들 시늉만 냈다. 한 번 해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흡족해 하며 달려들었던 시절이니까. 그렇게 해서 떡살은 절구공이에서 나무떡판으로 펼쳐지고 콩고물을 묻혀서 잘게 썰리면 먹기도 좋고 보기에도 좋은 떡으로 만들어진다.

또한 다식판이 있었는데 콩가루, 녹말, 송화, 검은깨 등의 가루를 꿀에 혼합해 다식판에 적당량을 넣고 눌러서 둥글고 예쁜 무늬 모양의 과자로 만들기도 했다. 부엌에서는 제사상에 올려질 음식들이 만들어지면 대청마루 위에 펼쳐놓고 만든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부침, 전류, 시루떡약식, 식혜, 나물, 산적, 밤, 대추, 과일 등 준비한 음식을 채반 위에 펼쳐놓았다. 그렇게 해서 다음날 차례 때 쓰일 정성스런 음식이 마련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도 이것저것 잘 챙기시며 여러 가지 일을 하셨고 그 날 저녁에는 제기(祭器)에 과일 담는 일을 도맡아 하셨다. 그때 옆에서 아버지를 돕곤 했는데, 특히 밤 껍질을 벗기고 참을성 있게 밤톨을 쳐서 하얀 알밤을 차곡차곡 몇 층으로 쌓아 놓던 게 기억난다. 그렇게 음식을 준비하고 설날 아침 일찍부터 몸을 깨끗이 하고 설빔으로 갈아입고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조상께 경건한 마음으로 상서롭고 복된 한해가 되기를 빌었다. 차례가 끝나면 음식을 맛있게 나눠 먹고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고 설날 놀이를 하면서 즐겁게 지냈다.

지금도 설날이면 가끔 친척집에 간다. 그러나 예전에 비하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많은 이들이 도회지로 떠나고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농촌의 인구는 점점 줄어드는 현상 때문이다. 그때 그 시절 농촌 풍경은 북적거리며 친구들과 동네사람들, 일가 친척들의 훈훈한 인심과 정감이 된 눈길로 큰집 마당으로 모여 멍석을 말고, 차일 치고, 널뛰기나 팽이치기, 윷놀이, 말타기, 그네 타기, 연날리기, 자치기, 땅따먹기, 돌치기, 굴렁쇠 굴리기, 딱총몰이, 술래잡기, 공기놀이 등을 했는데. 또 대보름 때에는 쥐불놀이도 한바탕 벌어졌었는데… 지금은 아스라한 추억 속의 정겨웠던 설날 풍경으로만 남아있다. 우리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도회지의 경쟁사회와 급속히 변화되는 세태로 인해 약식(略式)으로 치러지는 설날이 돼버렸다. 우리의 오랜 설날의 문화와 전통이 옛 풍경이 되고있지 않나 돌아보면 그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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