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범 / 광복회 고양시지회장

군내 만세시위 한 달 동안 37회 이상
262명 체포되면서도 폭행 행사치 않아

3·1독립운동 당시의 고양군은 지금보다 면적이 상당히 넓었다. 그때의 경성부(京城府.서울)는 인구17만~18만(외국인제외)정도였고 경성부 주변(뚝섬 포함)은 전부 고양군에 속해 있었다. 고양군의 군민들은 22면 가운데 1개 면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일제통치에 항거해 봉기함으로써 거군적(擧郡的)인 항일투쟁의지를 과시했다.

고양군의 3·1운동은 3월5일 오전11시 용강면 동막리에 위치한 흥영학교(興英學校) 여학생들이 하교에 들어온 정호석(鄭浩錫)등 2~3명의 청년들의 권유에 따라 학교를 나와 마포방면으로 진출하며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시작됐다. 3월9일 오후에는 한지면의 상왕십리에서 300명의 주민들이 왕십리 보통학교 교정에 집결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고, 연희면 수색에서도 수백 명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후 약2주간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고양군민들은 다시 3월23일 왕십리에서 시위를 시작으로 3월28일 외곽지역인 중면의 횃불 만세시위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원당면을 제외한 군내 11개 면에서 치열한 애국적인 항일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고양군의 만세시위운동 37회가 넘는 만세시위사건 가운데 3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위가 3월23일 이후 경성지역의 시위 재개에 호응해 일어났다. 특히 용강면 한지면 연희면 숭인면 은평면 둑도면 등의 만세시위는 3월23일부터 재개한 경성의 시위운동과 보조를 함께 하다시피 하였고, 경성지역으로 진출하거나 경성시민들과 연합하여 시위를 전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후인 3월24일 이후 28일까지 만세운동에서는 지도면 중면 송포면 벽제면 등 농촌지역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3월23일 경성 시외지역에서 13차례의 시위가 일어났으나 3월24일 이후 고양군의 시위가 종결되는 28일까지 5일 동안에는 경성 시외의 도시지역에서는 모두 9차례의 시위가 있었던데 비해 고양군의 외곽을 형성하는 농촌지역에서는 11차례 이상의 시위가 전개됐던 것이다.

3월25일 뚝섬시위는 고양군내 최대의 시위였을 뿐만 아니라 사망자 1명과 부상자 12명의 희생자를 낸 최대의 유혈사태였는데 시위참가자의 대부분이 노동자들이었다. 뚝섬 시위의 주동자로 체포 기소된 12명 가운데에는 단순노동자를 비롯하여 마차꾼 소달구지꾼 짐차꾼 등 노동자들이 10명으로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도면의 행주리, 중면의 일산리, 송포면의 대화리와 같은 농촌지역에서 시일을 두고 2차례 이상의 시위가 전개된것은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고양군민들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일반적인 시위형태로부터 주변의 산 위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거나 시장의 전포를 철시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분노를 과시했다.

시위규모는 30명으로부터 2000명에 달하고 청량리에서는 지나가는 전차에 돌을 던지기도 했고, 면사무소 부근에서 시위하는 경우가 보통이었으며, 뚝섬이나 중면의 일산의 시위처럼 노골적으로 친일적 태도를 보인 면장들이나 일부면서기 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곤 했다.
3월말 천주교도들이 각 면장과 면서기에게 조선독립에 관하여 무관심하고 안연(晏然)히 사무를 집행함은 조선인으로서 부당하며 속히 파직하고 우리들에 가담하라는 요지의 협박장을 발송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자료상으로는 모두 나타나고 있지는 않으나 일제는 고양군민들의 평화적인 만세 시위운동을 무력진압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총과 칼로 무장한 헌병들을 출동시켜 구타하거나 칼로 찌르고 총을 쏘는 등 무자비한 방법을 동원하여 강제로 진압했다.
일제관헌 보고 자료에 의거하더라도 고양군에서 사망 1명, 부상 6명을 포함해 최소한 262명의 군민들이 체포됐고 이들 중 상당수가 재판에 회부돼 감옥에 감금됐다. 그 과정에서 한인은 아무런 폭행을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시위과정에서의 자인한 폭행과 살상은 물론 체포 기소된 고양군민들이 체포 강금 재판 수형 과정에서 겪은 온갖 형태의 악형과 그로 인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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