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북벌을 염원하던 명나라 '굴씨'묘

“굴씨는 짐승을 사랑하면 사람보다 더 순종한다는 사실을 입증하여 전설적인 여인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손가락 하나로 모든 짐승과 새를 자기 뜻대로 다룰 줄 알았으며 사람들이 ‘별다른 비술이라도 있는가’고 묻자, ‘사랑만이 오직 그 비술’이라고 대꾸한다. …… 옛날에 서도(西道)길을 복판에 두고 좌우에 붉은 무덤이 두 개 있어 원한을 영세에 못 푼다 하였으니 그 왼쪽에 있는 것이 굴씨의 붉은 무덤이라면 그 오른쪽에 있는 붉은 무덤은 누구의 무덤이던가.”(이규태 저 ‘민속한국사 1’ 중에서)

80년대 초반 이규태(조선일보 논설고문)씨는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에 왔다가 생을 마감한 궁녀 굴씨의 무덤이 덕양구 대자동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 방문을 했다. 하지만 굴씨묘를 찾지 못하고 자신의 저서 ‘민속한국사’ 1권에 그 이야기를 옮겨 놓았다.

고양신문은 대자동에 있다는 두 개의 붉은 무덤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중 하나는 이미 알려져 있는 최영장군묘, 다른 하나는 이방 여인 굴씨의 묘다. 굴씨묘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커녕 굴씨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자동이라는 것 하나로 위치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김지용(71·대자동) 할아버지에게 물었는데 의외로 쉬운 답을 얻었다. 위치를 알고 있다는 것. 소현세자 종중 땅에 있다고 했다.

붉은 묘에 대한 이야기를 뒤로 미루고 먼저 굴씨에 대해 알아보자. 굴씨는 어떻게 해서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왔으며 청나라의 환국령에 응하지 않고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했을까.

소현세자는 북경에 머물 당시 독일인 선교사 아담 샬과 친교를 갖고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문물을 접하게 된다. 이후 아담 샬은 청나라 황실에 부탁을 해 세자가 귀국할 때 세례 받은 환관과 궁녀를 딸려 보낼 것을 건의한다. 이렇게 해서 굴씨는 환관 이방조(李邦詔)·장삼외(張三畏)·유중림(劉仲林)·곡풍등(谷豊登)·두문방(竇文芳)과 함께 1644년 11월 조선에 오게 된다.

귀국한 소현세자가 두 달만에 죽게되자 청나라는 환관과 궁녀들에게 환국령을 내린다. 본디 명나라의 궁녀였던 굴씨는 이에 응하지 않고 조선왕실에 남아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효종의 북벌계획을 알고 있었던 굴씨는 유언을 남겼다. “나를 서울의 서쪽 교외 중국가는 큰 길 옆에 묻어달라. 우리 임금님(효종)이 청나라 정벌하러 나가는 대열을 죽어서라도 눈을 부릅뜨고 볼 수 있게끔….”(민속한국사)

이 유언대로 굴씨는 덕양구 대자동에 묻혔다. 이곳은 나중에 소현세자의 종중 땅이 된 곳이며, 셋째 아들인 경안군묘(1986년 고양시지정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자신이 소원하던 곳에 묻혔는데 왜 붉은 무덤이 됐을까. 장사지내기는 했으나 무덤을 돌볼 사람이 없었던 것. 굴씨는 유배지에서 살아남아 나중에 복원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을 끝까지 보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치적 소외세력이었던 소현세자 일가로서는 굴씨묘까지 돌볼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소현세자 종손인 이우석(77·대자동·사진) 옹은 굴씨에 대해 회상한다. “이 어른은 우리 가문의 은인이야. 유배지에서 겨우 살아난 경안군도 어른의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가문을 일으키지 못했을 거야. 그랬으면 지금 나도 없는 거지.”

이우석 할아버지는 또 “여기 비석도 있었는데 난리통에 부서졌어. 지난해 4월에 사초를 하면서 받침돌이라도 찾아 비석을 세우려 했는데 찾지 못했어. 그저 사는 게 바빠 관리를 소홀히 한 우리가 잘못이지. 나도 사업한다고 내 시내(서울)에 나가 살다가 늘그막에 돌아왔어”라며 팽개쳐진 무덤으로 방치했던 것을 자책하기도.

대자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김지용(71) 할아버지는 “이승만 대통령 때 마을로 연락이 왔어. 굴씨묘를 찾아온다는 거야. 그래서 마을사람하고 군인들이 나서서 묘 주변을 정리했지. 진입로도 만들고. 그때 만든 진입로는 지금 없어졌어. 다시 가려진 묘가 된 거지”라며 소현세자 종중 땅에 있는 묘가 굴씨묘임을 확인시켜줬다.

효종은 굴씨가 명나라 황실에서 익혔던 상투트는 법 등 정통을 시범케 했고, 그것으로 본을 삼기도 했다. 그후 송시열은 굴씨의 법을 본으로 전국적인 통일을 주청하기도. 또 북벌을 계획하고 있던 효종은 굴씨를 청나라 황실을 염탐케 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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