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노트

구랍 21일 김지용 할아버지가 굴씨묘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어둠이 내렸지만 현장을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김 할아버지는 늦은 시간도 마다하지 않고 굴씨묘로 안내했다.

작은 손전등 하나로는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묘소로 올라가는 길도 정비돼 있지 않았다. 단지 할아버지의 감만으로 찾을 수밖에. 첫 번째 찾은 묘지는 잘 정돈돼 있었으나 굴씨묘가 아니었다.

야산 속에서 잠시 헤매다 굴씨묘를 찾았다. 초라한 묘였다. 비문을 확인했다. ‘굴씨지묘(屈氏之墓)’라고 써 있었다. 하지만 취재팀은 이내 실망했다. 원래 서있던 비석은 없어지고 2001년 4월에 새로 세운 비석이 서 있었다. 김지용 할아버지는 “예전에 비석을 본 것 같은데, 어디로 치웠나”한다.

24일 묘지 관리인이며 소현세자의 종손인 이우석 할아버지와 약속을 하고 현장에서 만났다. 밝은 날 보는 굴씨묘는 웬지 더 초라해 보였다. 이방 여인의 한 많은 삶 때문에 풀이 나지 않는 붉은 묘라더니…. 지난 4월에 사초를 하지 않았다면 이나마도 유지되지 못했겠지 하며 위안을 삼았다.

이우석 할아버지는 “이제부터라도 우리 종중에서 잘 모셔야지”한다. 그러면서 조선조 때 숨죽여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일, 군사정권 때도 왕족이라는 이유로 없는 듯 살아 왔던 이야기를 푸념 삼아 내뱉는다. ‘우리 가문 여기 있오’하고 떳떳이 살았던 때는 일제시대 때 조상들이 독립운동 할 때와 문민정부 이후란다.

소현세자가 왕이 됐다면 굴씨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또 우리 나라의 역사는 어떤 모습을 하게 됐을까. 현실은 이방 여인 굴씨가 대자동 언덕에 초라하게 묻혀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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