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와 사림의 청나라에 대한 반감은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까지 이어지게 된다.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거하던 인조는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삼전도의 굴욕’까지 당하게 되고, 세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한다.

북경생활을 하던 소현세자는 강대국이 되어 버린 청나라와의 화친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때문에 소현세자는 청나라 사람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청에 들어와 있던 서양문물도 독일인 선교사 아담 샬을 통해 접하게 된다.

이즈음 한양의 조정에서는 세자 일행의 북경 체류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하여 ‘세자가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가’, ‘청나라에서 인조를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왕에 앉히려 한다’는 등의 풍문이 떠돌기 시작한다.

북경에서 8년여를 생활하던 소현세자는 1644년 천주교 세례를 받은 환관과 궁녀 일행을 이끌고 귀국하게 된다. 귀국한 세자는 병을 얻어 두 달만에 죽게 되고 함께 왔던 환관 일행은 본국으로 돌아간다. 이때 오랑캐 궁정에 돌아가지 않겠다 하여 이 땅에 묻힌 궁녀가 있는가 하면, 임진강을 건너다 신을 벗어놓고 투신해 죽은 궁녀도 있다한다.

우리 나라에서 죽은 궁녀가 대자동에 묻힌 굴씨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중국관계자와 만난 자리에서 소현세자와 굴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굴씨묘를 단장하라고 지시했다고 대자동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건강하던 세자가 빨리 죽은 것을 두고 사가들은 인조와 권력투쟁에서 밀려 독살 당했다고 주장하기도. 소현세자 종중에서는 이를 확신한다.

이렇게 죽은 소현세자는 서삼릉 소경원에 묻혔고, 세자빈 강씨는 용인에 묻혔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 세자빈 일가가 몰살당했으며, 세자의 세 아들 경선군·경완군·경안군도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다. 두 형은 유배지에서 죽고 경안군만 살아서 소현세자의 가문을 잊게 된다. 그 후 숙종조 때 세자빈 강씨와 아들들이 복권된다.

소현세자가 청나라로부터 귀국할 때 가져온 것은 천주상(天主像)을 비롯 ‘천주연기’ 등 서양문물과 관련된 서적 8권이다. 후세 사가들은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시기도 300년은 족히 앞섰을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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