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오르면 100배 즐겁다

2002년은 유엔이 정한 ‘세계 산의 해’다. 산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어떤 산들이 있는지, 또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함께 고민할 때다.

매일 바라보고 때론 오르기도 하는 주변의 산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혹은 그 산에 묻혀 있는 설화나 유물 유적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것들이 갖는 역사적 가치는…. 또 한가지 질문을 한다면 고양시에서 가장 높은 산은?

고양시에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산은 모두 35개다. 이 산들은 저마다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지역문화형성에 중심적 역할을 해 왔다. 또 역사적 가치가 있는 많은 유적들도 품고 있는 곳이 이들 산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 설화와 전승도 품고 있다.

수난의 역사와 함께 한 고양의 산들

고양시의 산은 한반도 역사와 함께 했다. 삼국시대에는 고양지역을 차지한 세력이 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격전지였다. 처음에는 백제가, 다음은 고구려가(이와 관련한 설화가 고봉산에 전해온다), 이후 신라의 세력권(북한산에 진흥왕 순수비가 있다)에 편입된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노급지였으며 수도 서울의 생필품을 공급해 주는 통로가 고양시였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품고 있는 곳이 고양시의 산이었으며, 현대사의 질곡 또한 품고 있다. 통일 논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요즘은 통일의 길목에 위치한 도시라 하여 통일한국 수도의 배후 도시로서의 중요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풍수학자 최창조 박사는 92년 신도시 입주가 막 시작됐을 무렵 경향신문에 이런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기도 했다.(한국의 자생풍수 2권 참조)

신도시 개발과 함께 고양시에 있는 많은 산들은 깎이고 잘리는 수난을 겪었다. 신도시 건설 당시 곳곳에 위치해 있던 구릉을 밀어 엎고 평지를 만들었다. 유일하게 남은 산이 정발산. 그나마도 땅을 다지기 위해 흙을 덮어 개발전 산 높이보다 낮아졌다. 또 행신동과 화정동의 경계에 있던 가라산은 대부분 잘려나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자유로 이산포 진입로가 나있는 곳에는 이산(二山)이 있었다. 높이는 뒷동산 수준. 인천, 부천을 왕래하던 나룻배가 사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 꼭 거쳐가던 곳이다. 이산(二山)도 정상으로 자유로 출입 램프가 설치돼 있어 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

현대사에서만 수난을 겪은 것은 아니다. 덕양산은 임진왜란의 격전지가 됐던 곳이며, 고봉산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격전지였다. 전쟁의 상처를 산이 그대로 품고 있는 셈. 또 고봉산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 때 고봉산 정상에 지름 50cm, 깊이 2m의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쇳물을 부었다.

북한산은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산성 안에 있던 행궁이 불타고 자리만 남아있다. 또 한국전쟁을 겪어낸 유적들이 총탄의 상흔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

고양시 산들의 수난은 2002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경기도로부터 실시승인을 얻은 일산2지구 택지개발공사가 시작되면 고봉산 습지를 포함해 산의 많은 부분을 잃게 된다. 개명산도 골프장 건설과 관련해서 몸살을 앓고 있다. 풍동숲도 풍동지구 택지개발로 사라질 위기다.

또한 정부의 개발제한구역해제와 군부대와 관련해 고도제한을 받아오던 자연녹지들에 대한 규제가 완화돼 고양시의 많은 지역이 개발로 몸살을 앓게될 형편이다.

산에 산재한 유적들

고양시에서 가장 높은 산인 북한산(해발 863m)은 어느 산보다 유적을 많이 품고 있는 산이다. 18세기초에 쌓은 북한산성(사적 제162호)이 지금도 남아있다. 북한산 제일봉인 백운대 정상에는 해주 출생의 독립운동가였던 정재용 선생이 쓴 ‘3·1운동 암각문’이 향토유적 제32호로 지정돼 있다. 또 북한동에 위치한 태고사에는 ‘원증국사탑’과 ‘원증국사탑비’가 각각 보물 749호, 611호로 지정돼 있다. 이외에도 비봉에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서있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덕양산(해발 124m)도 임진왜란 때 3대첩의 하나인 행주산성전투의 현장으로 많은 유적이 있다. 산성은 사적 제56호로 지정됐으며, 그 안에 지방유형문화재 제74호인 행주대첩비 구비 2기가 있다. 고봉산(해발 208.8m)은 고구려의 토성 성곽 터가 남아있으며 봉수대도 있었다.

옛 고양군청이 위치했던 고양동과 대자동에 둘러 있는 대자산(해발 210m)도 조선 역사와 관련된 많은 유적을 품고 있는 산이다. 고양동 쪽은 중국의 사신들이 머물던 공용숙박시설 벽제관지(사적 144호)와 고양향교(문화재 자료 제69호)가 있다. 대자동 쪽으로는 최영장군묘(기념물 제23호)와 소현세자의 아들과 손자인 경안군·임창군묘(향토유적 제5호)가 있다. 또 부근에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할 때 함께 따라온 명나라 궁녀 굴씨묘도 있다.

지축동에 위치한 노고산(해발 495.7m)에는 신라시대 사찰인 흥국사가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143호인 극락구품도와 2001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다. 원흥동 나무드머리 마을에 위치한 건지산에는 신라말부터 고려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도요지(문화재자료 제64호)가 있다.

고양시에 위치한 또 다른 산들은 △대덕산(해발 126.8m·덕은동) △봉대산(해발 95m·강매동) △정발산(해발 70m·마두동) △황룡산(해발 134.5m·성석동) △영주산(해발 52m·대장동) △망월산(해발 169.4m·화전동) △봉산(해발 209.6m·용두동) △앵봉(해발 235.7m·동산동) △독산(해발 133.4m·문봉동) △명봉산(해발 247.6m·내유동) △우암산(해발 328.6m·벽제동) △성라산(성사동) △장산(노루뫼·구산동)

◆고양시 봉화 통로

고양시는 북쪽으로부터 전달돼오는 봉화를 서울로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 당시의 봉화 통로는 파주 형제봉→고봉산→대덕산→서울 안산 코스와 파주 대산→독산→봉산→서울 안산코스가 있었다. 이외에도 봉대산은 서울 남산으로, 앵봉의 봉수대는 서울 무악으로 전달됐다. 고양시의 봉수는 대부분 인조 14년인 1636년부터 고종 때까지 이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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