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의 산에 얽힌 이야기들

◇고봉산이 테미산인 이유=옛날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산신령이 한양에 갖다 쓸만한 좋은 산들을 전국에서 모집했다. 심학산과 테미산(고봉산)도 도읍 한 지리를 차지하려고 한양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심학산이 남들보다 먼저 가려고 걸음을 다투는데 저 앞을 보니 테미산이 자기보다 먼저 가려고 떠득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화가 난 심학산이 “에이 더러운 자식, 꺼져버려라”하고는 발길로 뻥 걷어차니 테미산의 머리가 깨졌다. 그후 테미산은 머리에 테를 메게돼 테메산(테미산)이라 불렀다.

◇고봉산에 전해오는 한씨설화=‘고구려 안장왕이 왕자였던 시절 백제 땅이었던 고양을 정탐하러 왔다가 한씨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둘의 사랑은 깊어졌고 만나는 횟수도 늘어난다. 고구려 왕자는 왕위에 올라 안장왕이 되고 백제를 칠 계획을 세운다. 고양의 태수에게 붙잡혔다 풀려난 한씨 여인은 고봉산에 올라 신호를 하여 안장왕과 재회한다. 고양 땅을 차지한 고구려는 서울의 아차산까지 진격하여 영토를 넓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명태조로부터 이름붙여진 산=식사동과 문봉동의 경계에 위치한 견달산(해발 130m)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명태조 홍무년에 상서로운 기운이 명태조 세수대야에 비쳤다. 길흉을 점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기운을 따라가게 하였더니 그 산이 견달산이었다. 산 정상에 올라가 보니 우물이 있는데 우물가에 감나무가 있었으며 그 감나무에는 홍시 한 개가 달려 있는데 크기가 옥쟁반과 같아서 그 기운이 남경 명태조 세수대야에 흘러 비쳤다 한다. 드디어 그 홍시를 따서 태조께 바쳤더니 이 산의 이름을 견달산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다.’

◇이산(二山)의 명당자리=지세와 경치가 행주나루와 더불어 자웅을 다투었다는 이산(二山)에도 명당자리에 얽힌 설화가 하나 전해 내려온다. ‘이산 위의 한 봉우리가 우뚝한데 높이가 십여척이고 정상이 펑퍼짐하여 능히 5~60명이 앉을 만한 곳이 있다. 들찬이 멀리 둘러싸고 석세(石勢)가 험준하여 물건을 운반하는 배가 사고를 당하는 수가 많아 뱃사람들이 이곳을 지난 때면 반드시 삼가고 조심하던 곳이다. 백수십년전에 걸인 최만창이라는 사람이 이 아래에서 걸식하다가 굶어죽어 장사한 후 그 아들이 찾아와서 정상 수보 아래에 이장 했더니 오래지 않아서 무과에 올라 그 무덤을 고쳐 봉축하고 관직이 변방의 장수에 이르렀고 가세가 점점 부유하여 졌다. 이런 연유로 오늘날 주위 사람들도 이산은 명당이라고 말한다.’

◇이성계가 살아남은 이야기=이성계가 새로운 왕조의 도읍을 정하기 위해 동생과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다 하루는 탄현에 들어섰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피할 곳을 찾아 마치 모자 채양 처럼 생긴 바위 밑의 굴로 피신했다. 굴속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굴 앞에 나타났다. 바로 호랑이 집이었던 것이다. 이때 동생이 둘 다 죽을 수 없으니 각자 굴 밖으로 옷을 던져 호랑이가 깔고 앉은 옷의 임자가 굴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했다. 이성계도 찬성하고 옷을 밖으로 던졌는데 호랑이는 이성계의 옷을 깔고 앉았다. 이성계가 굴안에서 나오자 호랑이는 굴로 뛰어들어 동생을 물어 죽였다. 이성계는 동생을 물려 죽은 자리에 장사했는데 그 자리가 현재 홀트학교가 있는 고개 쪽이라 전해진다.
<자료출처 : 고양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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