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기 / 전교조 고양초등지회 사무국장

가을 햇살이 따갑다. 형형색색의 만국기 아래 해맑은 웃음이 넘쳐나는 계절이다. 학교마다 가을운동회가 끝나가고 있다. 초등학교에선 결실의 계절, 가을을 맞아 이제 다시 준비해야할 행사가 하나 더 있다. ‘학예회’다. 보통 학예회는 ‘작품전시회’와 ‘예능발표회’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그 동안 갈고 닦은 끼와 열정을 유감없이 발휘함으로써 스스로 도전하고 개척하는 태도를 이끌고 자존감과 성취감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학교에서도 지난 10일 학예회가 진행되었다.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현란한 율동을 선보이기도 하고 재미난 개그 난장이 펼쳐지기도 하며 학부모들의 박수와 웃음보따리를 풀어 헤쳤다. 즐겁고 유쾌한 행사였다. 우리 반에서도 십 수 일 전부터 ‘사랑으로’ 라는 음악에 맞춰 수화를 연습해왔었고 공연을 했다. 아침 자습시간이나 점심시간, 자투리 시간들을 활용한 연습이다 보니 완성도가 떨어졌을 법도 한데 공연이 시작되자 손 사위는 나무랄 것도 없고 아이들 얼굴 하나 하나에서 빛이 나는 듯하여 공연을 지켜보며 황홀하기까지 했다. 학부모의 박수와 환호성이 화답이 되어 돌아 왔을 때 아이들도, 나도 기쁨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공연을 지켜보고 전시회를 준비하며 몇 가지 씁쓸함이 남는다. 아이들의 작품으로 치장되어야 할 전시장은 언제부턴가 학부모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이들의 솜씨보다는 엄마의 공이 더욱 깃들여지기 시작했다. 한 학년 작품 전시장의 모습은 그대로 다른 학년 학부모의 동요를 불러 일으켰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시장의 모습은 ‘킨텍스’나 ‘코엑스’ 전시장을 옮겨 놓은 듯 손색이 없었다. 완성된 모습은 훌륭했지만 어느 틈에 목표는 있으되 목적이 사라지고 말았다.

경쟁은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더더구나 보여지기 위한 경쟁이란 더욱 목적을 잃고 목표만이 남는다. 아이들의 숨은 끼를 발산한 예능발표회도 마찬가지다. 숨 고르고 지켜보았던 ‘기타’ 연주는 학원선생님의 지휘가 있어야 했고, 늠름함을 품어내던 태권무는 태권도장 사범님의 기합소리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난 아무리 훌륭한 모습일지라도 박수를 보내고 싶진 않았다. 작은 예능 발표회였지만 아이들에겐 아니, 아이들의 부모들에겐 경쟁의 무대였던 듯싶다.

10월 14∼15일은 우리 아이들이 전국적으로 일제고사를 치른다. 자신의 성적이 공개되고 앞으로는 학교의 성적이 공개될 전망이다. 과연 이러한 경쟁에서 목적이 있긴 한 걸까? 더더구나 모든 아이들은 자신이 본 시험점수에 상관없이 상대적으로 서열이 정해진다고 한다. 예를 들어 80%가 100점이고 20%가 95점일 경우 95점은 ‘우수’,‘보통’,‘기초’,‘미달’ 중 ‘기초’나‘미달’ 인 아이가 될 수밖에 없는 상대적 서열화 시험이다. 초등학교부터 기초나 미달이란 수식을 달아야 할 그 아이가 받을 상처를 생각이나 한 걸까? 이런 시험이 국가의 경쟁력 강화와 관련이 있긴 한 걸까?

보다 나은 인정을 받기 위해 사교육시장의 경쟁력은 높일지 모르겠다. 무턱대고 지금의 사회는 경쟁과 효율을 지상 최대의 가치인양 선전되고 있다. 경제활동에서나 시장원리에 따른 경쟁이 통용될 뿐이지 인간을 기르는 교육에선 달라야 한다. 경제란 인간에 종속된 여러 개념 중 하나에 불과한 하위 개념일 수밖에 없다면 인간을 기르는 교육에 있어 경제 논리는 당연히 미천한 이론에 불과할 뿐이지 않을까?

5살짜리 우리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대뜸 엄마를 걱정하며 이야기한다.
“엄마! 이제 배 안 아파?”
5살짜리가 어젯밤 늦게 배가 아파 손을 딴 엄마를 잊지도 않고 있었다니 얼마나 기특한지 모른다. 연거푸 뽀뽀를 해주었다. 하지만 경쟁교육이 현실을 지배해 가는 한 인간다운 아이의 모습은 점점 모습을 감출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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