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옥 /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벼룩의 간을 내먹지…. 쌀 직불보조금을 수령한 고위 공직자의 명단을 공개하라.″
전국 농민들의 성난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요 며칠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쌀 직불보조금이란 말 그대로 정부가 쌀 재배 농가의 소득을 일정 수준으로 보장하기 위해 지급하는 보조금이다. 원 취지대로라면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 돌아가야 할 보조금이 부재지주로 땅을 사놓고 농사도 짓지 않는 사람들에게 돌아갔다는데 문제의 소지가 있다. 특히 고위공직자 신분으로 손에 흙 하나 묻히지 않은 자들이 버젓이 직불 보조금을 타먹었다는 사실은 농사를 짓지 않는 일반 국민들로서도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다.

조선 중기 뛰어난 한시문의 대가이자 ‘자랑스런 고양인’ 석주 권필 선생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서 고위공직자들의 비열한 행동을 들먹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평생을 청빈하게 살다간 석주 권필 선생이 그리워지는 시대를 살기 때문일 것이다.
석주 권필 선생은 지금으로부터 439년 전인 1569년 (선조 2년) 12월 26일 고양 현석촌에서 아버지 권벽과 어머니 경주 정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9세에 능히 글을 지을 만큼 뛰어난 글재주를 지닌 선생은 조선왕조 창업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권근의 6세손이다. 선생이 살다간 조선 중기는 밖으로는 임진왜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고 안으로는 끊임없는 당쟁으로 인한 사대부사회의 분열이 극에 다르던 때였다.

선생은 이미 19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하고 복시에서도 장원하였으나 답안지의 글자 하나가 틀리다는 이유로 장원이 뒤바뀌는 불운을 겪게 되는데 이 또한 극심한 당쟁이 빚어낸 희생의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스승이던 송강 정철이 유배 길에 오르는 것을 보고 선생은 한평생 벼슬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혹독한 가난과 곤궁 속에서도 높은 벼슬과 부귀영화 보기를 썩은 흙만도 못하게 여기며 꼿꼿한 자세로 시와 술을 벗삼았다. 특히 선생의 지배층에 대한 비판의식은 날카로웠으며 이들을 소재로 풍자시를 쓸 때에는 그 기상이 서릿발 같았다. 시 한편을 감상해보자.
 
외척 중에 새로 귀하게 된 사람이 많아
붉은 대문이 궁궐을 둘러쌌네
노래소리,풍악소리에 놀음 잔치 일삼고
갖옷과 말은 가벼움과 살찜을 다투네
단지 영화로움과 욕됨을 따질 뿐이지
옳고 그름은 수고로이 묻지도 않네
어찌 알리오 쑥대 지붕아래서
추운 밤 쇠덕석 덮고 우는 백성을 ! (詠史, 권 3: 155)

선생은 33세 때 이정귀의 천거로 명나라의 대문장가 고천준(顧天俊)이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 영접할 문사로 뽑혀 이름을 떨친바 있으며 이때 선조는 선생의 시와 문장을 높이 평가하고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선생이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채 어렵게 사는 것을 보고 동몽교관직을 제수하게 되지만 녹봉을 받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며 거절한다. 국가관리가 되어 녹봉을 받는 일조차 마다한 채 청빈한 삶을 살다간 선생에 비해 작금의 국가관리 들은 불법적인 방법을 총동원해서라도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가리고 있으니 선생 보기가 새삼 부끄러울 뿐이다.

지난 주말 선생의 묘지를 찾아가던 날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탐욕은 극에 달하고 도덕은 땅에 떨어져 더 기대할 것 없는 오늘날의 이른바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시대의 진정한 어른이셨던 올곧은 선비 석주 권필 선생이 불현듯 그리워진다. 호수공원에 선생의 시비가 세워진다니 완공되면 평소 좋아하시던 가을 국화주 한 잔 들고 찾아가 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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