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두 쪽 나도 초생달은 뜨지 않는다

어문학자 수준 쯤 되는 원로 교정기자 출신 언론인이 우리말 맞춤법에 관한 글을 쓰고 붙인 제목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초생달이 뜨지 않다니.

이미 고인이 된 원로가수 현인 씨가 구성지게 불렀던 국민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에서도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초생달’은 어디까지나 입말(口語)일 뿐, 정확한 글말(文語)은 ‘초승달’이다. 이생(生)이 ‘이승’되듯 초생(初生)이 ‘초승’되어 초승달이라고 쓰지 않으면 시험에선 빵점이다. 입말은 비문(非文), 즉 문법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 글말만이 정확성을 갖는다.

입으로 하는 말을 입말이요 글로 쓰는 말을 글말이라 한다. 입말과 글말은 일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른바 언문일치(言文一致)운동이 개화기부터 전개됐지만 그 성과가 곧장 눈에 띄게 나타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수 십 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는 대체로 다르지 않은 입말과 글말을 쓰는 편이다. 그러나 그 쓰임의 맥락이나 상황이 분명히 다르니 둘이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입말의 즉흥성에 비추어 글말이 입말을 닮아가는 과정을 겪는다.

“왜 그리 방정맞니?”라고 하면, 말이나 행동이 찬찬하지 못하고 몹시 까불어 점잖지 않다는 부정적인 의미다. ‘방정하다’의 어근으로 쓰이는 한자어 ‘방정(方正)’과, 접사가 결합한 명사 ‘방정’은 소리는 같지만 의미가 다르다. 우리말 ‘방정’은 입말에서 많이 사용하지만 한자어 ‘방정(方正)’은 “위 학생은 품행이 방정하고 성적이 우수하여…”처럼 상장의 문구에서나 쓰이는 말이었다.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다 보니 ‘방정하다’를 ‘방정맞다’와 구분하지 않고 쓰기도 하지만 둘은 완전히 다른 말이다.

“성적표를 보더니 얼굴이 울그락붉으락 해졌다”고 흔히 말한다. ‘붉으락푸르락’을 잘 못 쓴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울그락붉으락으로 통하다보니 글말도 그렇게 쓰는 줄 알고 틀린 답안을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긁어모으다’(재물)와 ‘그러모으다’(낙엽)를 혼동해 쓸 때가 많고 ‘허섭스레기’도 ‘허접쓰레기’라고 말하고 발음 나오는 대로 그냥 쓴다.

투박한 고장 말, 즉 지방 사투리가 차츰 세련된 표준말로 바뀌는 변화도 빼놓을 수 없다. 꾸밈없고 정겨운 벗끼리의 대화가 마치 어느 영화에나 나오는 대사처럼 말쑥해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교육으로 인한 ‘인식의 상향평준화(上向平準化)’라고나 할까.

입말로 쓰면 “아이고, 속 시끄럽어라. 내가 니한테 우째야 되겠노?” 하던 것도 ‘먹물’이 조금씩 들면서 “참, 곤혹스럽네. 넌 내가 네게 어떻게 하길 원하니?”하는 식으로 바뀐다. “어느 놈이 암까마귄지, 수까마귄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또 “한 배 실어도 기울지도 않겠다”’는 얘기는 무게가 같다는 뜻이니 둘 다 같아서 어느 누가 낫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 즉 ‘난형난제(難兄難弟)라는 말의 입말인 셈이다.

우리말에선 사물을 주어로 하거나 수동태의 문장을 잘 쓰지 않는다. 이발사가 깎지만 우리는 ‘머리를 깎았다’고 하고, 운전대를 잡지 않았어도 ‘차를 몰았다’고 한다.
글씨를 엉망으로 써 알아보기 힘들 때 어른들은 ‘개발새발 썼다’고 야단친다. 그러나 ‘고양이발 개발’을 의미하는 ‘괴발개발’이 올바른 표현이다. 시속 따라 맞춤법도 진화한다. 그러나 다짜고짜 입말대로 고치다보면 우리말의 정체성을 흔들 수 있다. 교육을 통해 바른 말을 지켜나가는 노력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정영수(본지 편집위원.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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