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0만m² 2만여명에서 7만5000가구로

▲ 일산신도시 개발에 반대하는 이들의 안타까운 자살이 이어지기도 했다. 당시 주간고양신문 1면.
‘자살은 이제 그만, 생명은 고귀한 것’
1989년 6월 29일 고양신문(당시 주간고양) 1면 머릿기사 제목이다. 같은 해 4월 27일 정부의 신도시 건설계획 발표가 있은 후 고양군 주민들은 반발하며 백지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가 정부시책이라며 백지화 불가 입장을 고수하던 중에 5월 29일 강병채(백석6리, 당시 55세), 25일 이은진(백석3리, 67세), 6월 24일 박용술씨(일산12리, 55세)가 목숨을 끊었다. 6월 14일에는 유윤선씨(마두1리, 24세)가 자살을 기도했다가 목숨을 건졌다.

같은 해 발간된 고양신문 창간호 역시 1면 기사로 ‘1989년 일산의 봄’이란 제목으로 정부의 신도시 건설계획에 반대하며 주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시위를 벌이는 현장사진을 내보냈다. 90년대 초반 고양시는 개발발표와 반대, 분양, 입주, 그에 따른 각종 분쟁으로 소란스럽기만 했다. 

 1980년대 들어 서울시의 인구집중이 가속화되자 서울변두리인 목동과 상계동에 주택기능 중심의 신시가지가 건설됐다. 그래도 여전히 서울시내는 주택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80년대 후반 주택난으로 주택가격이 폭등하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가 대두되자 정부는 수도권 5개 신도시를 개발하게 된다. 이처럼 분당과 일산 1기 신도시는 주택가격 안정을 위해 조성됐다.

당시 일산은 서울 중심에서 북서쪽으로 29km, 수색에서 15km 거리에 위치하고 비교적 평탄한 구릉지가 많은 데다 한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개발 유력지로 꼽혀왔다. 그러나 절대농지와 군사보호지역으로 토지개발이 제한되어왔다. 1520만6680m²(460만평) 중 1041만3270m²(315만평)이 농지이고, 이중 70%가 절대농지였다. 4000여가구에 2만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주민들의 대부분은 농업, 축산업 등에 종사했다.

▲ 1989년 창간 고양신문 1면에는 반대시위를 벌이는 주민들의 모습이 실렸다.
정부는 일산에 7만5000가구에 저밀도, 서구식 전원도시를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전체 부지1520만6680m²(460만평) 중 578만5150m²(175만평)을 택지로, 12만23146m²(37만평)은 상업유통부지로, 184만평은 도로 하천부지, 608만2672m²(64만평)은 공원부지로 활용한다는 방침이었다. 소요예산은 1조5176억원.

정부의 발표와 사업추진은 급하고 바빴다. 당시 국토개발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신도시 개발에 참여했던 안건혁 교수는 당시의 정부가 무리한 일정을 추진했다고 지적했다. 89년 4월 27일 신도시개발을 발표하고, 같은 해 12월 입주자 분양을 약속했다. 기본계획과 개발계획에 두세달의 시간만이 주어졌다. 인구 40만을 수용하는 대규모 신도시, 그것도 처음 만드는 도시의 그림을 개인집 짓는 것보다 더 ‘후닥닥’ 그려냈다. 당시 건설업계가 200만호를 5년만에 짓는다는 구상 자체도 문제가 있었다고 안교수는 지적했다. 겨우 연간 20만호밖에는 지을 역량이 안되는데 두배가 넘는 공사 계획을 잡은 것이다. 결국 설익은 개발계획과 추진으로 초기 입주자들은 크고 작은 하자와 도시기반시설의 부족, 갈등의 문제를 겪어야만 했다.

입주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 고양군 주민들은 89년 4월 30일 각 마을의 이장들을 중심으로 대책위를 구성해, 5월 1일 대책위의 이름을 ‘일산신도시 건설 결사반대 투쟁위원회’로 바꾸고 전면 백지화를 요구했다.
당시 주민들은 구성원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농민들에게 택지화란 곧 생활 터전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집값이 비교적 싼 신도시가 될 경우 자가소유자는 세입자로, 새입자는 결국 영원한 철거민이 될 수밖에 없다는 피해의식이 강했다. 피땀 흘려 가꾸어 놓은 생활터전을 도시화라는 명분아래 빼앗기고, 서울의 중산층을 위해 희생해야한다는 사실을 주민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개발발표이후 4개월이 지나 31개 마을 대표와 고양군수, 당시 토지개발공사 대표와의 간담회에서도 주민들의 반대 입장을 꺽이지 않았다.

▲ 고양신문(당시 주간고양)이 당시 개발이전의 고양군을 그림으로 그렸다.
“대대로 이어온 고향을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젊은이들이 고향땅을 지키겠다고 시위에 참가했는데 칭찬하고 격려할 일이지 잡아넣겠다는 엄포는 주민 모두를 무시하는 일이다.” “주민의 70~80%가 찬성한다는 고양군수의 말은 근거 없다.” “대체농지라고 하는 문발리는 짠바닷물이 밴 곳이라 농사용지로는 적합하지 못하며 문발리 60만평이 460만평이라는 농민의 기름진 땅을 대체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그러나 일산신도시는 1990년 10월 지역거주자들을 대상으로 한 1차 분양이 시작됐고, 다음해 8월 30일 69세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대이주를 하게 된다.

당시 신도시 지표조사단장으로 활동했던 손보기 교수(단국대 한국민속학 연구소장)는 3년 동안의 일산지역 프로젝트를 완료한 조사보고서 일산신도시 개발지역 학술조사 보고 책자에서 일산개발의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지표조사 과정에서 끝까지 땅과 옛 가옥을 지키려는 주민들을 보면서, 많은 소중한 민속자료들이 포크레인에 파헤쳐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주민들과 함께 느꼈다. 일산지구는 바닷물에 이어 강물, 또 식물대가 썩어 생성된 토탄층으로 인해 농사가 잘되고, 가뭄을 타지 않는 농토로 농사에 최적지이다.”

당시 손보기 교수는 밤가시 초가가 민속자료로 지정된 것이 작은 위로가 된다며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를 되짚어보라고 거듭 촉구하기도 했다.
 

<주요 일지>
1989년 4월 27일 분당 일산지구 신도시건설계획 발표
4월 30일 일산지역 신도시 결사반대 투쟁위원회 발족
5월 1일 일산지역 5개리 23개 마을주민들 반대시위
5월 19일 일산읍 농민 강병채씨 비관자살
5월 28일 건설교통부 신도시 입주책 발표
5월 29일 건교부 일산농민 대체농지 제공 발표
6월 24일 일산신도시 입주권 취득자격 발표
1990년 2월 9일 주민이주단지 풍리(현재 풍동) 26000평 건설 계획 발표
4월 3일 보상계획 공고
5월 11일 토지공사, 일산신도시 이주 생활대책 발표
10월 31일 1차 분양(지역거주자우선)
1991년
7월 26일 일산신도시 행정대집행(강제철거)
8월 14일 청약접수

<이번 기획기사는 한국언론재단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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