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마두동 첫 입주자, 최영미씨

▲ 일산 초기 입주자인 최영미씨는 청약통장 상담 때문에 우연히 찾아간 은행 직원의 권유로 강촌마을 아파트 분양을 신청했다. 그 이후 20년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둘째아이도 일산에서 태어나, 이제 최씨 가족에게 일산은 고향이 되었다.
1992년 9월 28일 531세대가 일산 신도시에 첫 입주하면서 일산은 새로운 주민을 맞이하게 된다. 첫 입주단지였던 마두동 강촌마을은 당시 허허벌판에 도로도 제대로 갖춰 있지 않고, 상가나 필수 기반시설이 거의 없어 황량하기만 했다. 1시간마다 다니는 백마기차역을 통해 남편들은 출퇴근하고 주부들은 먼 거리를 빙빙 도는 버스를 한참 기다려 서울로 장을 보러 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불편했던 일산살이를 못 견뎌 초기에는 떠난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호수공원, 쇼핑센터, 학교와 시설들이 하나씩 들어서며 일산이 조금씩 살만한 도시로 탈바꿈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주민들은 지역의 주인으로 조금씩 정을 쌓아가게 됐다. 무엇보다 일산에서 새로운 사람, 공동체를 이뤄가며 이주민들은 지역을 위해 헌신하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더 이상 이주민, 토박이와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첫 아이가 세 살이던 1993년 일산으로 이사와 둘째아이를 이곳에서 낳은 최영미씨를 만나 일산이 고향이 된 사연과 지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은행에 청약통장 상담하러 갔더니 직원이 마침 신도시 신청 받는다고 신청을 권유하더군요. 일산과 분당, 모두 별 연고가 없으니 남편 직장인 일산이 낫겠다 싶어 일산을 선택했죠. 계약금을 내러 처음 일산을 와서 보니 얼마나 썰렁한지. 1989년 수해가 지나가고 난 11월이니 오죽했겠어요. 그렇게 마두동 강촌마을 32평 아파트를 6000만원에 분양받아 1993년 첫 일산신도시 입주자가 됐죠.” 

일산신도시 입주 초기 이주민으로 20년을 살아온 마두동 최영미씨(45세)는 서울 사당동에 살았다. 결혼하고 친정이나 시댁으로부터 별 도움받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단칸셋방을 탈출하기 위해 일산행을 선택했다.

87년 일산, 수마의 후유증에 황량
청약신청을 하고 계약금을 내기위해 찾아온 일산은 최악의 수해가 휩쓸고 간 뒤였다. 여기가 어떻게 “사람이 사는 곳이 될까”싶었다. 93년 입주를 하고도 상황은 크게 낫지 않았다. 최씨가 이사온 강촌마을 5단지는 민영아파트로는 첫 입주였다. 아파트 이외에는 구멍가게  조차도 없었다.

“집들이 장을 보러 연신내까지 갔다 왔죠. 907번 버스타고. 춥기는 얼마나 추운지. 일산은 바람이 유달리 세다고 그랬다니까요.”

가난한 신혼부부에게 6000만원은 큰돈이었다. 분양받은 집에서 6개월을 살고는 전세를 주었다. 자신들은 66.116m²(20평형) 아파트로 다시 전세를 들어갔다. 대출이자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여의도에 증권회사를 다니던 남편은 “아무래도 분당으로 가야겠다”는 말을 수시로 하며 일산생활을 불편해 했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소아과는 5시간을 기다려야했고, 버스편이 없어 남편은 여의도까지 카풀을 이용했다. 그래도 낙천적인 성격의 최영미씨는 “내집이 희망”이라 여기며 아이들과 하루하루를 엮어나갔다.

장보러 서울가고, 카풀로 출퇴근
일산으로 올 때 세 살이던 큰딸 아리가 초등학생이 되자 최영미씨 부부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옮겨왔다. 그 사이에 일산동이인 작은 아이 근아도 태어났다.

“97년 책읽는 걸 좋아하는 엄마들끼리 모여 동화읽는 어른모임이 만들어졌어요. 큰아이 손잡고, 작은 아이 업고 모임에 다녔죠. 어른 10명이 모이면 아이가 20명이 넘어 정신이 없었는데, 그래도 그게 너무 좋았어요.”

친척도, 친구도 없었던 일산에서 마음에 맞는 이들끼리 함께 책을 읽고, 모임을 하면서 일산은 조금씩 최영미씨 가족에게 고향이 되어갔다. 최씨는 스스로를 특별히 사회참여적인 사람이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오히려 낙천적인 성격 탓에 “아니면 떠나기보다는 바꾸자” 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참교육학부모회, 생협 한살림에 회원이 되고, 내 아이, 우리 동네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고교평준화, 러브호텔 반대 싸움에는 누구보다 열심을 냈다.

“내 아이 문제잖아요. 아이업고 광장으로, 거리로 나가 서명받고. 누구보다 열심을 냈죠.” 러브호텔은 마두동 바로 집 앞에 들어섰다. 역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 1989년 최악의 수해가 휩쓸고 간 일산. 그 황량했던 땅에 도시를 만든 건 토지공사지만 그 도시를 온기가 도는 마을로 만든 건 온전히 사람들의 힘이었다. 불편한 여건을 참지 못하고 떠난 이들도 많았지만 남은 이들은 일산을 고향으로, 살고싶은 도시로 만들어냈다.
고교평준화 서명 받으러 거리로
그러나 무엇보다 최영미씨 부부가 일산에 푹 빠져 “가긴 어딜 가냐”며 평생 일산살이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IMF때 찾아온 위기였다. 남편이 다니던 증권회사가 경제위기에 바로 부도가 났다. 남편의 실직에 최씨는 “걱정마라, 내가 벌테니 당신은 3년 동안 하고 싶은 공부나 하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영어학습지 교사로 나섰다. 월 50만원 수입으로 생활비도 빠듯했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을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았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최씨에게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편은 아침에 도시락 두 개 싸들고 도서관가죠. 아이들을 대화동 어린이 책방 동화나라와 동화읽는 모임 사무실에 맡기고 수업 끝나면 다시 찾아가서 놀다가 들어가고. 매일 살다시피 했어요.”

IMF 남편의 실직, 고기들고 찾아온 이웃
이웃들도 수시로 찾아왔다. “고기를 두 개 묶어서 너무 싸게 팔기에 샀다”며 하나를 놓고 가기도 하고, 장바구니 안에서 슬그머니 이것저것을 내려놓고 가는 이도 있었다. 정가로만 책을 팔기로 유명했던 동화나라 정병규 사장도 “책에 문제가 있다”는 등의 말을 둘러대며 책값을 깎아주었다. 책을 좋아하는 두 아이가 책을 사달라고 졸라대고 최씨가 난감해 하는 모습이 보기에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렇게 2년 동안 가장의 역할을 하던 최영미씨는 갑작스레 교통사고를 당하게 됐다. 막막해하고 있는 최씨에게 남편이 “여보, 나 취직했어” 한마디를 던졌다.

“안그런 척했지만 2년 동안 힘들긴 힘들었나봐요. 안도의 한숨이 다 나오더군요. 남편이 다시 출근하는데 와이셔츠 다리는 일이 얼마나 신나는지.”

최영미씨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절로 떠오른다. 어려운 일을 참고 견디면 그 일이 더 좋은 다음을 만들어냈다. 가장이 된 엄마를 따라 어린이 책방과 동화읽는 모임을 오가던 큰 아이 아리는 지금 고양외고 3학년이다. 어려서부터 언어에 두각을 나타냈던 아리는 그 흔한 해외연수 한번 안다녀왔지만 언어특기생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외고에 입학했다.

“우리 아리가 고양외고 갔다니까 주변에서 너무 억울해했어요. 공부도 잘못하고, 학원도 제대로 안다녔는데 어떻게 된거냐고.”

주변의 반응을 얘기하며 최씨는 정말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아리가 정말 언어 이외에는 수학이나 다른 과목에선 8등급 수준이란다. 외국어고등학교가 언어에 특별한 학생들을 미리 뽑아 육성하는 학교가 맞다면 아리는 제대로 찾아간 건데 주변의 반응이 우습기만 하다.

“잘못되면 떠나지 말고 바꾸자”
동화읽는 엄마 곁에서 책을 많이 읽어 내공이 쌓인 아리는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터득했다. 학원에 가지 않으니 학교수업도 졸지 않고 충실히 들을 수 있단다. “잘못되면 떠나지 말고 바꾸자”는 최씨의 소신은 교육에서도 적용된다. 다들 대안교육을 말하지만 그래도 공교육을 지키는 일이 후세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선생님들 흉많이 보잖아요. 제가 보니 10명중에 한두명 정도는 정말 문제있는 선생님들 있어요. 하지만 나머지 선생님들은 정말 열심히 가르치거든요.”

최씨의 남편은 새로 취직한 유명 증권회사에 잘 다니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분당가자”는 말은 하지 않는다. 최영미씨는 작년 마두동에 어린이책방 ‘알모’의 문을 열었다. 어려운 시기 도움을 받았던 어린이책방 동화나라가 문을 닫게 되자, 이를 아쉬워하다가 ‘일을 저지른 것’이다. 자신의 인건비는커녕 매월 70만원의 월세를 걱정하는 수준이지만 “우리 아리, 근아가 누렸던 걸 다른 사람들도 누려야 된다는 생각”이었기에 결심은 어렵지 않았다고. 알모는 동네 아이들이 큰아이 아리의 이름을 따서 ‘아리이모’라고 부르던 것이 줄여진 이름이다.

새로운 가족 집성촌을 만들어
“스타벅스가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브랜드가 됐잖아요. 일산에서 시작한 무언가가 커져서 일산만의 것이자, 세계적인 가치가 되는 그런 걸 원해요.”

고향이 된 일산에 대한 꿈과 바람은 크다. 그만큼 아쉽고 속상한 일도 많다. 개발 일변도의 행정에 화가나 때론 세금내주기 싫을 때도 있단다. 그래도 일산이 떠난 사람보다, 남아있는 도시, “가족까지 모아들여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도시”라는 점이 자랑스럽다.

황량했던 도시에 사람들이 깃들면 온기를 더해간다. “떠날까 말까” 를 고민하지만 결국 살만한 도시를 만들어가는 역할은 바로 그 고민을 하는 이들의 몫이다. 많은 이들이 왔다가 떠나기를 반복했고, 그들의 역할도 컸지만 이제 새롭게 만들어가는 일은 남아있는 토박이, 이주민을 넘어 주인을 자청하는 이들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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