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긴 자만이 모든 걸 갖지요(Winner takes it all).”


 ‘승자독식(勝者獨食)’의 쾌재를 부르짖는 아바의 멜로디가 당차게 울려 퍼진다. 그렇다. 역사도 승자의 논리이다. 그러나 또 다른 역사 속에서 승자의 논리는 역전되기도 한다. 그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대중문화에도 패배자의 정서를 담은 ‘루저(Loser)문화’가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 모든 문화는 현실의 반영이라고 볼 때 루저문화의 확산은 사회적으로 힘든 사람이 많이 생기고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88만원세대(우석훈-박권일 공저˙? 레디앙)>의 책 제목에 나오는 ‘88만원세대’는 아직도 우리에게 생소하다. 그러나 ‘88만원 세대’ 담론이 나온 지 벌써 3년째. 굳이 ‘88만원 세대’(20대 95%가 비정규직)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도 젊은이의 취업이 힘들다는 건 누구나 실감한다. 비정규직 평균임금 119만원에 20대 급여의 평균비율 74%를 곱해 88만원을 산출했다고 한다. 지금의 청년세대가 ‘88만원 세대’로 이름 붙여진 이유다. 프랑스 등 유럽에도 최저 임금을 의미하는 ‘1000유로 세대’가 적지 않게 등장할 정도로 청년의 취업난 은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닌 세계적 추세다.

어쨌든 극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양산하는 사회에서 ‘루저’의 삶도 매우 중요해졌다. 문화적으로도 대중음악과 드라마 등에서 루저의 정서를 노골적으로 담고 있으면서도, 이를 일상화하거나 미학적으로 승화시킨 작품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드라마 <내조의 여왕>에서 이른바 명문대 의대를 다녔던 수재지만 멘실모(멘사 출신 실업자들의 모임) 회원인 온달수(오지호 분)가 정규사원이 되기 위해 펼치는 눈물 나는 적응기는 결코 과장되지 않은 루저문화다.

인디음악을 통한 장기하의 성찰은 눈부시다. 현실이 힘들더라도 패자로 인생을 포기하지 말자는 일종의 ‘주술(呪術)’같은 자기암시이다. 그가 부르는 <달이 차  오른다, 가자> <싸구려 커피> 등은 메시지 자체에 팬들이 열광한다. 루저는 승자도 패자도 아니다.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 중요한 시간도 의미 있게 보내자는 의미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마치 영화 <초원의 빛(Splendour in the Grass)>에서 인용한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구처럼 “남은 여력으로 더 큰 힘을 찾을 것”이라는 일종의 자기 확신이 아닐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언제나 나보다 잘 나가는 상위 5%의 ‘엄친아’ 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청년계층을 중심으로 퍼지던 '루저'정서가 지난해 9월 이후 불어 닥친 경제위기로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루저문화'란 문자 그대로 패배자의 정서다. 취업이나 결혼에서 사업에서 낙오한 사람들의 처절한 삶을 송두리째 드러낸다. 그 속에 자괴와 절망감이 깔려있다. 그러나 그 나름대로의 정체성도 지니기에 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만 낙망하지 않는다는 점이 독자적 문화영역이다. 이는 새로운 문화현상이 아니다. 60년대 서구사회의 안티 문화, 90년대 우리 사회의 신세대 문화가 그러했다. 어느 시대에나 패배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부끄러울 것도 감출 것도 없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나만이 ‘엄친아’의 상대적 비교대상이 아니고, 나만 실직한 게 아니라 수 천 수 만 명의 ‘백수’가 있다. 어느 문화 전문가는 “용어에서 풍기는 부정적이고 안쓰러운 의미를 고려해 ‘비주류 문화’ 또는 ‘저항 문화’라고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귀담아 들을만하다.

아무래도 루저문화는 단순히 패배주의자로 남지 않는, 승자독식 사회에 저항하는 또 다른 미학이다. 어쩌면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문화 담론이 아닌 시대의 아픔일지도 모른다. 


정영수/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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