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대회에서 기절 후 축구 시합 뛴 악바리 근성
능곡 출신 70년대 축구 국가대표 미더필더 이영무 선수

 

70년대에 축구에 열광했던 팬들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1975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메르데카배 축구대회 결승전에서 천금같은 결승골을 넣고 무릅 꿇은 채 미끄러지며 기도하던 자그마한 키의 인상적이었던 한 선수를. 그가 바로 능곡 출신의 이영무 선수다.

이영무는 이은만 고양시 향토문화 보존회 고문이 내년에 발간하기로 한 ‘고양 인물지’에 고양을 빛낸 100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됐다.

당시 고양군 지도면 토당리 39번지에서 태어난 이영무는 성인이 돼서도 1m 65cm, 57kg이라는 왜소한 체격을 가진 선수였다. 그러나 이 체격조건을 잠시도 쉬지 않고 악착같이 뛰는 성실함으로 보완하며 1970년대 한국 대표팀의 주축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그가 축구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계기는 매년 광복절을 맞아 개최되는 지도지역체육대회에서 리 대항 축구시합이었다. ‘나도 한번 저런 열띤 응원을 받으며 뛰어야지’라고 생각했던 이영무는 지도지역체육대회에서 토당1리 대표로 나서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운동실력을 선보였다. 400m 달리기, 1500m 달리기, 마라톤 모두 1등, 축구 우승 등 그가 참여하는 경기마다 1등이었던 것이다.

“지도체육대회 마라톤에서 1등으로 들어온 후 기절해 쓰러졌는데 동네 어른들이 축구대회에 나가라며 또 다시 깨우는 거예요. 그 때는 병원에 데려가지 않아서 섭섭했지만 한편으로는 숟가락, 젓가락을 두드리며‘영무 잘 뛴다’라며 응원해준 덕분에 또 우승을 했던 것 같습니다”

능곡초 5학년 때 반 대항 축구시합에 두각을 나타내면서부터 축구부 코치의 권유로 능곡초 축구부에 가입했다. 처음에는 지도면장(1970년∼1973년)을 지낸 아버지 이광문씨와 어머니 박정숙씨의 반대가 심해 6한년 때에는 축구를 못하게 됐다.

“창가에 앉아 공부하는데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이번에는 창가에서 먼 자리에 앉히자 몰래 운동장에 나가 축구하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선생님이 부모님께 이 아이는 축구를 하지 않으면 안될 아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는 능곡중 시절 당시 경희대 체육학과에 다니던 이중구 현 고양시의원으로부터 기본기 위주로 지도를 받았다. 경희중·고 시절 새벽 6시, 밤 9시에 능곡과 서울로 오가는 첫차와 막차로 통학하며 피곤할 법한데도 틈틈이 팀훈련과 개인훈련을 하는 성실함을 보였다. 체격도 체력도 다른 선수에 비해 떨어졌던 이영무는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성실함이 뒷받침된 노력이었다. 이영무는 성실함을 아버지 이광문씨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아버님은 새벽기도 갔다 온 다음 밭·논일 갔다오고 난 후 마을 면장으로 하루종일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셨어요.”  

▲ 선수시절의 이영무 감독. 1976년 동대문 운동장에서 펼쳐진 박스컵 경기 개막전에서 프랑스 선수와 공을 다투고 있다. 이 경기에서 한국대표팀은 프랑스와 겨뤄 1-1로 비겼다.

경희중에서 2년 재수를 하고 진학한 경희고에서 2학년 때 이영무는 최연소로 청소년 대표로 뽑혔다. 당시 청소년 대표에는 선배 차범근, 황재만 선수가 있었고 동기로는 신현호, 유동춘 선수가 있었다. 1972년 2년동안 청소년국가대표, 1974년부터 8년동안 국가대표를 거치면서 이영무 선수는 1975년 킹스컵 대회에서 6골을 폭발시키며 MVP, 1980년 국내 축구 MVP를 수상하는 등 축구 엘리트 코스를 밟아갔다. 1995년에는 국가대표 올림픽팀 코치, 1996년에는 유니버시아드 국가대표축구코치를 역임했고 2005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역임했다.  2002년에는 한국역대 축구 베스트 일레븐상을 수상했다. 

이영무는 현재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 안산할렐루야축구단의 감독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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