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경험적 진리에 속한다. 사회성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로빈슨크루스적인 고립된 삶은 하나의 상상적 유희에 불과하다. 물론 인간 이외에도 더불어 사는 생명체는 무수히 많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동물들이 모두 사회적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사회(society)의 사전적 정의는 일정한 경계가 설정된 영토에서 종교, 가치관, 규범, 언어, 문화 등을 상호 공유하고 특정한 제도와 조직을 형성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집단이다. 따라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 함은 인간 공동의 규범 가치와 언어 및 문화를 갖고 있는 생명체임을 의미하고, 그래서 인간이 그리는 사회는 민족공동체, 종교공동체, 가치공동체, 언어공동체, 가족공동체, 문화공동체라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 사회는 하나의 공동체(community)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 공동체가 하나의 사회인 한에서 그저 집합을 의미하는 집단(group)일 수는 없다. 공동체가 집단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공동의 가치와 언어를, 즉 공동의 문화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는 공동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공동의 가치와 목적을 지향한다. 이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고 공동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바로 소통(communication)이다. 하버마스(J. Habermas)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의사소통행위야 말로 인간 공동체를 공동체이도록 해주는 결정적인 요소다. 소통이 없는 가치 및 목적 추구는 생각할 수 없듯이, 가치와 목적이 없는 공동체는 존재할 수도 없다. 그래서 공동체와 소통은 어원상으로도 함께 한다.

공동체와 소통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에서 소통의 부재가 심심치 않게 지적된다. 권위주의가 지배했던 우리 사회에서 특히 그렇다. 권위는, 그것도 강요된 권위는 소통에 치명적인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그릇된 권위가 지배하는 사회는 소통이 부재하는 공동체이고, 이런 공동체가 공동의 가치와 목적을 실현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우리 사회에서 조선시대는 차치하더라도 해방 후 들어선 정권들이 나름대로의 권위로 인해, 그래서 소통의 부재로 말미암아 그 종말이 시원치 않았다는 것은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이다. 장기집권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혀 독선의 울타리에 갇혔던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이 그랬고, 억눌렸던 문민과 국민의 이름을 볼모로 삼아 지역과 계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김영삼과 김대중 정권도 소통의 부재라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탈 권위를 내세우며 정권을 잡은 노무현 정권이 탈 지역주의는 이루었을지언정 코드와 계급 정치를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고, 정권초기부터 소고기파동을 야기한 이명박 정권 역시 새로운 권위와 소통의 부재에 시달리고 있다.

소통이 공동체 성립과 실현에 필수적인 조건이긴 하지만, 공동체에서 구성원 간의 원활한 소통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님을 역사가 잘 보여준다. 사실 성원들 간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은, 그래서 만사에 의견일치는 공동체의 이상이지 결코 현실일 수는 없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소통은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어느 정도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지가 그 공동체가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의 성취 정도를 가늠케 한다. 그런데 이 소통의 정도는 민주사회에 있어 대개 정치의 정도에 의존하고, 동시에 정치의 정도 역시 소통의 정도에 비례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정치적이긴 하지만 현대 민주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대체로 정치에 의존한다. 정치가 법을 만들고, 법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통의 정도는 공동체에서의 법이 얼마나 적실하게 만들어졌고 올바로 적용되고 있는지, 정치권력이 얼마나 정의롭게 행해지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해방 이후 대한민국 공간에서 소통의 부재가 있었다면 일차적으로 법과 정치(인)의 책임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정치꾼들이, 정치집단들이 이기적인 정치적 욕망에 따라 공동체 성원들(남녀, 세대, 지역, 이념, 계층 등) 간의 자유로운 소통을 방해하거나 금지했기 때문이다. 

소통은 공동체의 통합을, 단절은 갈등을 야기한다. 갈등이 없는 공동체, 유토피아는 물론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에서 갈등은 늘 있기 마련이고, 정치는 그 갈등과 분열을 얼마나 잘 치유하는가에 따라 그 수준이 매겨진다. 그런데 소통과 통합은 신뢰를 전제로 한다. 신뢰가 없는 소통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와 시민 간의 신뢰는 물론이고, 구성원 상호 간의 신뢰가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신뢰를 가능케 하는 정치, 신뢰에 토대를 둔 정치공동체는 모든 공동체의 으뜸이다. 그래서 인간의 공동체적 삶은 상호 간에 주고받는 신뢰에서 그 질이 결정된다.

소통이 공동체를, 신뢰가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면 구성원 간의 신뢰는 어떻게 가능한가. 플라톤이 말했듯이, 정의로운 국가에 의해 가능한가. 그렇다면 정의로운 국가는 어떻게 가능한가. 정의로운 통치자에 의해 가능한가. 다시 정의로운 통치자는 어떻게 가능하고 어떤 인간인가. 구성원들 간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끌어내어 질서 잡힌 공동체를 구성하는 자인가. 그러면 이런 인간의 내적인 모습은 어떠한가. 무엇보다도 자신과 소통되는, 그래서 자기 분열이 없는 자인가.

소통의 조건이 신뢰라면, 신뢰가 무엇보다도 정치에서 비롯된다면, 정치인은 공동체의 소통과 통합을 말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 소통의 문제는 없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자신과의 소통의 부재, 즉 자기 분열은 모든 파국의 근원이고 자기 소통이야말로 모든 소통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 사회에 있어 자기 분열이 없는 사람들은 정치 일선에 나가지 않는다는 데에 우리 공동체의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청문회나 국감에서 나라의 귀하신 일꾼들이 묻는 내용이나 태도를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이현복(한양대 교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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