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 장사익씨가 부른 노래가 있다. 

희망 한 단, “절망을 희망으로 채소 파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물어 본다. 아줌마 희망 한 단에 얼마래요.”

재미나는 표현이다. 희망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가 될까? 한참 일할 나이에 뇌졸중으로 사경을 헤맬 때 나의 희망은 얼마였을까? 발병하고 10년이 지난 지금 나의 희망은 얼마나 될까? 

장애인 초창기 때 나의 값어치는 없었다. 불구 몸에 희망은 없었다. 괜히 짜증내고 괜히 울적하고 괜히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하지만 힘이 들 때, 포기하고 싶을 때는 한결같이 내 옆에는 값으로 정할 수 없는 집사람이 있었다. 집사람은 나를 배신자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 세상 끝나는 날 저 세상에 갈 때는 꼭 둘이 같이 가자고 해놓고 먼저 죽으려고 했으니 배신자 아니냐고 한다. 

좀 더 일찍 희망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힘이 들지 않았을 덴데.

고통이 있어야 성장한다고 한다. 장애가 나의 한 부분이 되었을 때 다시금 희망을 알았고 지금껏 희망을 노래하며 산다. 모든 것이 절망일 때 같이 울고 같이 웃는 가족이 있고 글쓰기동아리가 있어 서로 아픔을 나누고 의지하며 살고 있다. 

올해로 병난 지 10년,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나 같은 경우에 딱 어울리는 것 같다. 집사람도 아이들도 점점 나에 대한 관심이 무뎌지는 것 같다. 가족들은 내가 이기적이라고 한다. 오른쪽이 마비가 되어 한쪽으로 기울어진 몸이 불편하여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많다. 의학적으로 오른쪽마비는 좌 뇌가 망가진 것인데, 특히 감각에 문제가 많다. 요즘 같은 봄 날씨에도 장갑을 끼고 다녀야 하고 집안에서도 난방이 꺼져 있으면 추워서 보일러를 가동해야만 한다. 그러면 집사람은 절약해야 한다며 전원 스위치를 누른다. 아침에는 환기를 해야 한다며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 둔다. 나는 그런 순간도 기다리질 못하고 짜증만 부리며 베란다 문을 닫아 버린다. 왜 그렇게 감정조절이 안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가장 힘들어 할 때 집사람이 한 말이 생각난다. 비록 “껍데기일지라도 살아서 우리에게 힘을 줘야지 이렇게 나약한 마음을 갖고 있느냐” 질타하면서도 용기를 주던 그 말이 생생하게 귀를 때린다. 그래서 요즘은 말을 순조롭게 하려고 신경을 많이 쓴다. 더 낮아지려고 납작 엎드린다. 

내 반쪽이 살아있어서 가족들한테 힘이 된다면 “살아야지 그래 살아야지” 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 가족들의 무관심은 나를 성질나게 한다.

말이 어눌해도 생각은 다 있는데 무시하면 화가 불 같이 일어나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이다. 무관심은 절망이고 관심은 희망이다. 진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 있다 보면 절망스런 환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나는 몸의 상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살아보라고 조언 아닌 조언을 하게 된다. 정말 인정하면서 살아 보라고. 몸이 불편한 것을, 병을 받아들이는 것을 그리고 남아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면서 감사하며 살아보라고. 

오른쪽이 불편하다보니 걸음도 손도 내 마음대로 안 되지만 나는 희망을 꿈꾼다. 예전에는 무식한 사고방식으로 ‘내가 이기나, 병이 이기나 한 번 해보자’하며 오기를 부렸는데 최근에야 생각이 바뀌었다. 현실을 ‘즐기자 웃으며 받아들이자’ 로 생활의 자세가 바뀌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바라보는 눈을 바꾸니 매순간 웃음이 절로 나온다.

기분이 좋아진다. 장사익의 노래 희망 한 단이 머릿속 턴테이블에서 돌고 돈다. 

춥지만/ 우리 이젠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기/한참을 돌아오는 길에는/채소파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물어본다/아줌마 희망 한 단에 얼마래요/희망이유 나도 몰라요/희망 한 단에 얼마에유/희망이유 채소나 한 단 사가세요.

 

/배동일 중도장애인 (대화동 장성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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