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의식 1등도시, 참여예산제 무산 아픈 기억도

2000년 10월 당시 고양시장은 국회 국정감사장에 섰다. 일명 ‘러브호텔’이라 불리는 숙박업소들이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 내에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황 시장은 집중 추궁을 받았다. 개인 재산권과 학교정화구역의 허술한 제도상의 문제를 들어 “책임없음”을 주장했던 시장을 국감장에 세우고,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고양시가 ‘러브호텔촌’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주민들의 러브호텔 반대운동이었음을 부인할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민참여, 제도·법을 바꾼다
러브호텔 주변의 대화, 마두, 백석, 탄현동 주민들은 스스로 모여 모임을 만들고, 시장과의 면담, 시정질의, 거리 시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모으고 전달했다. ‘러브호텔 난립에 대한 대안과 현 고양시장에 대한 책임을 묻는 설문조사’도 실시됐다. ‘러브호텔 및 유흥업소 난립저지 공동대책위’가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고양시민 96.8%가 교육환경 침해를 이유로 러브호텔을 반대하고, 그 책임을 시장의 잘못된 허가 행정(66%)으로 들고 있었다. 또 91.5%가 주민소환제를 도입해 현 시장에게 책임을 물어야한다고 답했다. 

제도적인 면에서 고양시 건축조례가 아파트 단지 100m 이내에는 숙박업소가 들어설 수 없고, 준농림지에는 관광호텔 이상의 숙박업소만 가능하도록 개정됐다. 관련 상위법인 도시계획법도 자연녹지지역에서 숙박업소 건축이 전면 금지되도록 개정됐다. 러브호텔에 이어 고양시를 뜨겁게 달군 이슈는 백석동 출판단지 용도변경 문제였다.  출판단지로 지정돼있던 3만여평을 토지공사와 이를 매입한 A건설사가 연이어 주상복합 용도로 변경 신청한 것에 대해 백석동 주민들을 중심으로 찬반 논란이 일어났다.

백석동, 고양시 최초 주민투표 
개발을 찬성하는 그룹과 반대하는 입장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2000년 7월  백석동에서는 백석동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가 중심이 되어 주민투표가 실시됐다. 백석동 1만448세대를 대상으로 실시한 투표결과 9911명이 참여했다. 찬성은 1114명(11.24%), 반대 8730명(88.08%), 기권 및 무효 67명으로 용도변경과 55층 주상복합건물 신축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백석동 주민투표는 주민자치의 앞선 자취였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여론이 분열되면서 지역에 상처를 남겼다는 명암이 교차한다. 당시 지역 시의원이었던 김범수 전 의원은 “작은 지역이라 투표결과가 나온 다음에도 주민들 간의 갈등이 생기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웠다”며 “개인적으로 주민투표는 주민참여 제도에서 가장 마지막에 활용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고양시는 2004년 6월 주민투표 조례안이 시행됐다.  조례안에 따르면 주민투표 대상 사안은 ▲구·동의 명칭 및 구역 변경·폐지·분합 ▲시·구·동의 사무소 소재지 변경 또는 설정 ▲다수 주민의 이용에 제공하기 위한 주요 공공시설의 설치 및 관리 ▲기금설치, 지방채 발행, 시와 민간이 공동출자하는 대규모 투자사업 등 주민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는 사항 ▲다른 법률에서 주민의 의견을 듣도록 한 사항 ▲기타 주민에게 주민의 복리, 안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주요 결정사항 등이다. 주민투표를 청구할 경우 서명해야 하는 주민의 수는 청구권자 총수의 15분의 1. 고양시 유권자수 70만여명을 기준으로 하면 4만600여명의 서명이 필요하다. 당시 시민단체들은 고양시가 타시군의 주민투표 청구인 20분의 1보다 더 까다로운 규정을 두었다며 비판을 하기도 했다. 

참여예산제, 시의회 반대로 무산
주민투표 이외에도 주민감사청구, 주민발의, 주민소송, 주민소환, 주민참여예산제. 현재 시행되거나 논의되는 주민참여제도는 이처럼 다양하다. 이중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시정에 직접적인 참여가 가능한 주민참여예산제는 고양시에서 아직 관련 조례도 없고, 시행도 하지 않고 있다. 어쩌면 고양시의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될 수 있지 않을까.

2003년 광주광역시 북구는 지역시민단체의 제안을 구청장이 받아들여 주민참여예산제도를 가장 먼저 시행했다. 매년 3~4월에는 각 동별 주민자치센터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주민참여예산제를 홍보하고, 예산학교가 운영된다. 7~10월까지는 각 동별로 구성된 7~10명으로 구성된 지역회의 위원이 참여하는 예산참여 지역회의가 진행된다. 여기에서는 다음 연도 예산편성 방향과 부문간 지출 우선 순위에 대한 의견수렴, 예산편성 관련 시민의견 수렴이 진행된다. 주민참여예산제 시행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원칙이 ‘정보공개’와 관련 공무원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광주에 이어 울산 동구, 북구, 대전 대덕구, 경기도 안산, 전남 순천, 충북 청주 등이 연이어 이를 받아들였다. 2005년 8월 지방재정법을 개정하면서 중앙정부도 주민참여예산제를 권고하게 된다. 2009년 6월 현재 전국 90여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참여예산 관련 조례를 재정했다. 이는 전체 지자체의 40%에 달하는 수치다.

고양시는 뒤늦게 2008년 7월 ‘고양시 시민 참여 예산제 운영 조례(안)’을 입법예고하고 시의회에 상정했다. 같은 해 9월 시의회는 의회와의 기능 중복의 문제, 시민들의 실질적인 참여, 전국적으로 인구 50만 이상의 도시에서 아직 제정되지 않아 역할 모델이 없는 점 등을 들어 결국 조례안을 보류시켰다.   

어렵지만 가야할 길, 주민자치
최성 시장과 범야권 연대 후보들이 약속한 협약서에는 자치헌장 제정부터 정보공개팀 부서 신설과 정보공개, 참여예산 조례 제정, 시민배심원단 운영, 주민자치학교 등 다양한 주민참여제도들이 포함돼있다. 최근 위원장 선출 과정에서 난항을 겪고 있는 시정운영위원회도 서둘러 진용을 갖추고 로컬거버넌스에 대한 약속을 이행해야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민주주의를 위한 시간의 지연, 비용 투여는 당연한 일이다. 토론회 과정에서 논쟁이나 분란이 생길 것이고, 예산이 더 소요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노력의 결과로 달콤한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희망제작소 박원순 대표는 첫 마음만 변하지 않는다면 과정 중의 어려움은 민주주의라는 소중한 열매를 위해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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