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살 소녀에서 77세 백발까지, 평생을 실천한 사랑
꿈꾸는 삶, 아름다운 변화 '홀트아동복지회 말리 홀트 이사장'

세평 남짓한 작은 방엔 낡은 옷장과 오래된 책상 하나만 덜렁 있다. 몸 하나 겨우 누울 수 있는 좁은 공간, 말리 홀트의 방이다. 국내 최대의 복지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의 방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다. 오래된 물건을 가리키며 특별한 의미를 묻자, 말리 이사장은 “나도 오래됐다”고 웃는다.

말리 홀트 이사장은 홀트아동복지회 산하의 여러 기관을 오가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일산복지타운 가족들을 보살피는 일에 많은 정성을 쏟는다. 말리 홀트 이사장은 자신이 간호사 출신이니, 장애가 심한 가족을 직접 챙겨야 한다며 수십 년을 중증장애인들과 한 집에서 살고 있다. 3살 때 홀트타운에 들어 온 이완복씨는 이제 54세. 뇌성마비를 앓았지만 ‘말리의 집’ 큰 언니로 톡톡한 역할을 하며 동생들을 꼼꼼히 챙겼다. 3년 전 장애가 더 심해져 이젠 침대에 누워 생활하고 있다. 말리는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다. 눈빛만 봐도 그녀가 뭘 원하는 지 안다. 한적한 토요일 오전. 말리 홀트 이사장은 삶은 감자와 달걀, 오이피클이 맛있게 어우러진 감자샐러드를 정성껏 만들고 있다.

“완복이가 감자 샐러드를 좋아해요. 삶은 계란을 많이 넣어야 더 맛있게 먹어요. 바쁠 때는 어쩔 수 없지만 시간만 나면 완복이와 수희, 가족들 음식을 만들어요.”

감자샐러드를 열심히 만들던 말리 홀트 이사장은 점심시간이 되자 수희(32세. 뇌성마비)씨의 밥을 챙긴다.  새 보육사에게 식사를 맡기는 것이 미덥지 않은 지, 찬찬히 쳐다보다 “내가 먹이겠다”며 밥그릇을 든다.

“수희 숟가락이 내 입에 들어가고 제 입에 들어가고. 수희는 중증장애를 앓고 있지만 동생들 몸 뒤척이는 소리 하나까지 챙기며 나보고 애기 보라고 눈치 줘요. 말은 못하지만 얼마든지 대화가 돼요.”

1956년 전쟁 직후 폐허가 된 한국 땅을 밟은 말리 홀트 이사장은 올해 77세, 백발이 됐다. 어머니 버다 홀트에게 한국의 전쟁고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한 19살 소녀는 할머니가 되도록 단 한 번도 그 마음이 변한 적이 없다. 전 재산을 투자해 전쟁고아들을 보살피고 복지타운을 만든 홀트가의 셋째 딸 말리는 이제 진짜 한국 할머니가 됐다. 한복이 편하고 침대보다 두툼한 요가 좋다.

장애인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다정한 ‘말리 언니’는 장애인들이 불편한 일에 대해서는 완고하다. 청소부터 식사, 화장실에서의 에티켓까지, 보육사들이 장애인들을 제대로 챙기고 있는 지 꼼꼼하게 살피며 맘에 들지 않으면 잘 할 때까지 잔소리를 한다. 직원들에 대해서는 지독한 시어머니다.

말리 홀트 이사장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해외로 입양됐던 아이들이 성장해서 다시 한국을 찾을 때이다. 18살이 넘으면 가족과 함께 홑트로 자원봉사를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함께 즐거운 시간도 갖는다.

“모두들 얼마나 착하고 예쁘게 컸는지, 너무 행복합니다. 세상에 홀로 남았던 그들이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힘입니다. 가족이 필요한 아이에게 가족이 되어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보내야 합니다.”

말리 이사장의 소망은 장애인들도 가족을 이루고 일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장애인 가족을 위한 아파트를 만들고, 아파트 바로 옆에는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작업장을 하나 만들고 싶다고 한다. 땅은 있는데… 고양시에서 허가만 내 준다면 해볼 수 있겠단다.

“나이들어도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드려요. 동생들도 말리 언니 오래 살도록 기도 많이 해줍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장애인과 고아들을 위해 사는 자신의 삶에 대해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파란 눈의 아름다운 한국인 말리 홀트.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에 19세 소녀 말리의 순수함과 원칙을 지키며 살아온 77세 말리의 완고함이 동시에 경쾌하게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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