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열 고양시정공동운영위원

▲ 고양시정공동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춘열씨. 전국에서 주목을 받은 고양의 민관 거버넌스 모델의 완성을 위해 시민사회단체가 다시한번 견인차 역할을 해야한다고.
이춘열. 전 시민회 대표, 전 금정굴공동대책위원장. 현 고양시정공동운영위원. 그러나 그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린 건 작년 지방선거에서 고양무지개연대를 통해 이뤄낸 야권연대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을 포함한 5개 야당과 시민사회단체가 한 몸이 되어 선거를 치뤘다. 정책과 공약을 함께 만들고 후보도 단일화했다. 당시 이춘열 위원은 민주당 일산서구 김현미 위원장과 ‘일심동체’를 이뤘다. 지역은 물론이고 중앙당에서도 반신반의하던 후보 단일화. 김 위원장이 뒤로 물러설 수 없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춘열, 그다.

익산 남성고를 수석 입학 졸업
이춘열 위원은 서울대 서양사학과 79학번이다. 고향인 전북 익산에서 그는 알아주는 수재였다. 남성고등학교를 수석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고등학교에서부터 그는 ‘운동권’이었다.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학교 재단을 상대로 한 싸움을 했다. 부연대장을 맡아 동맹휴학을 하고, 수업을 거부했다. 당시 4명이 주동을 해서 다 퇴학당하고 나만 구제를 받았다. 학교에서 서울대 입학생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만 지금 생각하면 다른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서울대에 입학하자마자 이춘열 위원은 벽보에 붙은 ‘역사철학회’ 서클을 찾아가 가입했다. 당시 유행하던 ‘언더서클’이었다. “그때는 우리말로 된 사회과학 서적이 전무하던 시절이다. 언더서클에서 페다고지 같은 책을 영어로 읽었다. 일본어도 그곳에서 배웠다. 학교 공부는 대충 했고, 함께 합숙을 하며 진보적 서적과 논문들을 읽었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유기홍 전 국회의원, 김동춘 교수가 당시 자매서클 1년 선배였고, 임해규 의원은 서클 1년 후보였다. 유시민 전 의원은 다른 서클 회원이었지만 얼굴을 익히 알고 있었다고.

광주항쟁이 있던 1980년, 3학년이었다. 학기초부터 학교가 술렁이다가 휴교령이 내려졌다. 다른 학생들처럼 이춘열 위원은 야학을 하면서 현장을 준비했다. 현장에 가기 전 군대를 갔다. 그곳에서 병을 얻게 돼 그는 현장을 포기하고 출판사에 들어갔다. 처음 입사한 곳이 삼성출판사였다. 이후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등으로 옮겨가며 지금 그가 직업으로 삼고 있는 번역을 배웠다. 출판사에서 일하면서도 구로, 가리봉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야학을 계속 했다. 한글이나 영어 수업 지문을 노동자들을 위한 내용으로 해서 교재도 직접 만들었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불광동에서 살다가 방 두칸짜리 값싼 셋방을 찾아1989년  주교동으로 이사를 왔다. 방두칸짜리 전세가 500만원이었다.

단칸셋방 찾아 주교동으로 이사
“당시 애 엄마가 고양주민회, 지금의 시민회 활동을 했다. 나는 1992년 대선 공감단 활동을 통해 처음 고양시의 지역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당시 고양시민회가 위기였는데 임재홍 전 부회장이 내게 함께 시민회를 다시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김양원, 이영문, 최창의, 임재홍, 박혜숙씨 등과 시민회를 다시 세우는 일에 힘을 쏟았다. 금정굴 문제에도 관여하게 됐다. 가수 정태춘씨를 불러 고양문예회관에서 대규모 공연도 열었다. 지역운동에 재미가 붙은 걸까. 이춘열 위원은 출판사를 그만 두고 번역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가 이무열이라는 필명으로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번역가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코끼리를 춤추게 하라’ ‘블링크’ ‘위대한 기업으로’ 등의 번역서는 베스트셀러로 지금까지 교보문고 등에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번역서는 지금까지 50권도 넘어 자신도 다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1994년에 직접 쓴 ‘러시아사 100장면’은 최근 재출간됐고, 어린이들을 위한 ‘시끌벅적 세계사’도 꾸준히 팔리고 있다.

금정굴 진상규명과 이춘열 위원도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 “무슨 일이든 잡으면 끝장을 보는 성격” 덕분에 1999년에 금정굴 진상규명에 대한 책임을 그가 맡게 됐다. 당시 경기도의회 전 나진택 의원의 도움으로 진상규명안이 도의회를 통과했지만 고양시와 시의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법제정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전국 민간인학살 범국민위원회 활동까지 영역을 확장하게 된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진실화해위원회가 명예회복과 유족들에 대한 사과, 추모사업 등을 권고했지만 금정굴의 유골들은 아직도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금정굴 진상규명 “끝까지 책임져야”
덕분에 아직도 이춘열 위원은 금정굴 유족들과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날을 세우고 있다. 지역에서 그의 ‘독설’은 유명하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중 그 때문에 눈물 바람을 했다는 이들도 많다. 시민사회단체 내에서도 ‘독재’라며 비난을 자주 받는다.

“합리적 행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다 들어주고, 효과적인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 옳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 안에 달성해야할 목표가 있을 불가피한 선택이 있을 수 있다. 말투는 바꿀 생각이 있긴 하지만  잘못된 걸 그대로 덮어주고, 다독이는 것보다 분명하고, 명확하게 지적해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건 안다. 가끔은 부드럽게 말해야 효과가 크다는 것도 안다. 고치고 싶긴 한데 그놈의 성격 때문에….”

그가 독한 말을 주로 퍼붓게 되는 주제 중 하나가 금정굴. 어려운 시절 유족들의 편에 서서 흔쾌히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이춘열 위원. 그러고 보면 그는 '독설'에도 목적과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하는게 아닌가 싶다.

“현실정치? 솔직해서 못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던 고양의 야권연대와 민관거버넌스. 그러나 지금 고양시는 안팎의 내홍을 겪으며 당초의 약속을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기본적으로 성공한 것은 맞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의 결속이 느슨했기 때문에 시장이나 당선자들을 견인해내지 못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이춘열 독재’이야기가 나왔다. 시민사회단체 내에서조차 공감이 부족했다. 이끌고 온 주체가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 1차적 비난을 제 정당에 돌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그가 왜 직접 정치에 뛰어들지 않냐는 궁금증을 제기한다. 왜 그럴까. “지금 정치현실에서 진보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고서는 당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정언법에 따라 ‘이놈의 세상, 왜 1%가 99%를 챙기냐’고 외치고 싶다. 시의원이 동네 민원 해결하는 자리 아니라고 ‘나한테 민원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할텐데 누가 나를 뽑아주겠나.(웃음)”

지역에서는 그를 불편해하는 이들이 많다. 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가 갖고 있는 여러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고양 지역사회에 대한 그의 헌신과 열정이 오늘의 고양시민운동을 있게 했다고 한다면 너무 과한 평가일까. 그의 한계를 열악한 지역운동, 시민운동의 한계라고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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