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간 있던 충장사 자리서 이동…6.25로 파괴 사연 많은 비

1593년 2월 12일 새벽 6시경. 왜군 3만여명이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보름전인 1월 27일 왜군은 지금의 덕양구 벽제동 일대에서 벌어졌던 ‘벽제관 전투’에서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 4만3000명을 궤멸시킨 후라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날이 저물 때야 끝났던 이날 전투의 결과는 조선군의 승리. 2300여명으로 3만여명의 왜군을 상대해야 했던 조선군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권율(1537~1599)의 독전으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왜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대부터 고바야카와 다카가게가 이끄는 제7대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했으나 모두 처참하게 패하고 물러났다. 전투의 막바지에 이르러 조선군의 화살이 바닥나자 왜군이 제2성책을 넘어 성안으로 들어오려는 순간 경기 수사 이빈이 수만개의 화살을 실은 배 2척을 몰고 와, 왜군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이자 왜군은 당황하여 물러났다. 모든 전쟁이 드라마틱하지만 행주대첩은 더했다.  

행주대첩비는 모두 3기   
그 시대뿐만 아니라 후대 사람들은 이러한‘행주대첩’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지금까지 세워진 행주대첩비는 3기(초건비․중건비․대첩탑)로 모두 행주산성 일대에 세워졌다. 행주대첩이 벌어진 9년 후인 1602년(선조 35년) 제일 처음 세워진‘초건비’는 지금의 덕양구 행주내동 산40번지 덕양산 정상에 위치해 있다. 초건비는 권율의 휘하장수들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비문은 당대의 명문장가 최립(1539~1612이 짓고 글씨는 유명한 한석봉(1543~1605)이 썼다. 초건비는 현재 받침돌이 땅에 묻히고, 비몸이 어깨부분에서 밑부분까지 금이 가 있어,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초건비가 250년 가까운 세월동안 풍우에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해지자 1845년(헌종 11년)에 똑같은 모양의 비를 새로 세웠다. 이것이 바로 ‘중건비’ 인데 지금의 행주서원 자리에 위치했었다. 중건비 역시 6.25전쟁 당시 크게 훼손되어 새롭게 새울 필요가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행주산성 성역화 작업을 시작한 직후인 1970년 행주산성 내 충장사 앞에 새로 중건비를 옮겨 세웠다. 중건비는 1978년 경기도지정문화재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다.

중건비가 충장사 앞으로 옮겨진 해인 1970년 문화재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초건비․중건비와 별도로 15.2m의 높이로 제3호 행주대첩비를 새로 세워는데 이것이 ‘대첩탑’이다. 초건비와 함께 덕양산 정상에 있는 대첩비의 비명은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중건비 이전 합당하나 후속조치 필요
이 3기의 행주대첩비 중에서 충장사 앞에 있던 중건비가 지난 21일 원래 있던 자리인 행주서원으로 다시 옮겨졌다. 1970년 충장사 앞에 세워진 이후 41년 만에 원래 자리로 옮긴 셈이다. 중건비 이전을 추진한 고양시는 지난 2009년부터 경기도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들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중건비 이전이 합당하다’는 답변을 얻었다. 이에 고양시는 지난해 중건비 이전을 위한 절차인 현상변경을 신청해서 승인을 얻어냈다. 심준용 고양시 학예연구사는 “중건비를 문화재로 지정한 경기도와 문화재청 전문가들의 자문을 한 결과 문화재 관리보존의 기본인 원형보존의 원칙에 따라 원래 자리로 옮기는 것이 합당하다는 답변을 얻었다”며 “중건비 이전을 위한 법적 절차를 모두 거쳤다”고 말했다.   

▲ 지난 21일 행주대첩 중건비가 행주서원으로 옮겨감에 따라 안내판만 덩그라니 놓여져 있다.
▲ 행주대첩 중건비가 원래 자리인 행주서원으로 옮겨가기는 했지만, 중건비를 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일반인들에게 폐쇄된 행주서원이 개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중건비 이전이 시민들의 수렴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련부서인 행주산성관리사업소의 업무협조도 없이 시의 문화예술과 단독으로 이뤄졌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더구나 중건비가 옮겨진 행주서원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지 않고 있다. 고양시 향토문화보존회 안재성 회장은 “행주산성을 답사하고 공부하던 시민들이 40여 년동안 충장사 앞에 있던 중건비를 갑작스럽게 보지 못하게 됐다”며 “시민들이 혼란을 초래치 않게 하기 위해 안내판만 덩그라니 있는 충장사 앞 중건비 자리에 복원비를 세우든지 행주서원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행주산성관리사업소의 이필용 관리팀장은 “사업소에서 중건비 이전을 강행하는 것을 이전 한달전인 지난 2월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이에 시 문화정책과 담당자는 “행주산성관리사업소에 충장사에 업무협조문을 보냈고 행주서원을 개방하는 것을 계속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표-행주대첩비 3기 현황

비명  위치                                                    건립시기                     높이(m)
제1호 초건비 덕양구 행주내동 산40 덕양산 정상    1602(선조35년)            1.88
제2호 중건비 덕양구 행주외동 162-1 행주서원        1845(헌종11년)            2.33
제3호 대첩탑 덕양구 행주내동 산40 덕양산 정상     1970년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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