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다닐 때는 만나지 못했던 고등학교 동문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신도시라는 특수성 때문인 것 같다.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신도시라는 새로운 공동체로 몰려들면서 만나는 횟수가 잦아진다. 나로서는 반갑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한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내 이름을 대면서 그 사람이 너 맞느냐고 한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친구는 일산에서 냉면 집을 한다고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을 했고 그 이후로는 직접 만나 보지 못하고 지내 왔다. 대학교 다니는 동안 연극 팜플렛에 나온 그 친구의 사진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친구가 연극을 하고 있는 줄만 알았다.

이 친구는 내가 전에 원장으로 있던 한의원에 갔다고 한다. 거기서 내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친구는 나를 수소문해서 만나러 왔다.

부인이 임신 중인데 너무 힘들어해서 한약을 써보려고 한단다. 내가 익히 보아오던 사람들과 너무나 달라서 놀랐다. 요즘사람들은 아는 게 많아서 임신 중에는 어떤 약이라도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한약도 약이니까 함부로 복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버렸다. 나도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될 수 있으면 한약을 권하지는 않는다.

예전에는 임신을 하면 두 사람의 몫을 해야하기 때문에 오히려 보약을 먹던 것이 상식이었다. 세상이 달라져서 상식도 변한 것인지, 양약과 한약을 동일시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한약은 음식보다 효력이 있는 식물들이 대부분이다. 음식으로 쓰이는 약재도 많다. 더덕, 인삼, 황기, 도라지, 은행 등은 너무나 잘 아는 것들이다. 물론 약재 중에는 독한 성질이 있는 것도 있다. 임신부에게 독한 약을 쓸 한의사는 없을 것이므로 나는 친구부인에게 한약을 지어 주었고 한약을 먹고 나서 기운이 살아나서 냉면집일을 잘해 나가고 있다.

출산 일을 좀 앞당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보고 이 부부가 요즘 보기 드문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다. 임신 중인 부인이 7,8월은 냉면 집의 성수기인데 본인이 오래 누워있으면 남편 혼자 힘든 일을 다 해야 한다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친구가 자기 가게에 한번 와 달라고 부탁을 한다. 가족들 전체가 진료를 받아야 하는데 시간도 없고 부모님이 가시지 않겠다고 하니 힘들더라도 방문진료를 해 달라는 것이다. 내 몸만 있으면 어디서도 진료를 할 수는 있지만 진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와 환자사이의 믿음이므로 병원에서의 만남이 가장 좋다.
친구가 그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데도 한 번만 와달라고 부탁을 해서 찾아가게 되었다.

냉면 집은 많이 붐비고 있었다. 시간 약속을 하지 않았던 터라 부모님은 나와 계시지 않았다. 그래 부모님을 진찰하러 친구 집으로 갔다.
부모님도 계셨고 일을 도와주러 오신 이모님도 계셨다. 노인들은 약을 드신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으므로 마음 편히 드시게 해야 된다고 다같이 약을 드셔야 한단다.

다시 가게로 와서 친구 내외를 보았다. 힘든 일은 자기들만 하는 게 아니니 주방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도 좀 봐 달라고 한다. 같이 일을 하는 데 자기들만 약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씀이 대단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다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맞을 텐 데도 내가 이렇게 놀라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배우는 이유는 자기의 할 도리를 잘하기 위해서다. 많이 배우고도 남을 배려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잘 못 배운 것이다.

내가 친구 가족들을 봐 주러 간 것이 아니었다. 그 좋은 마음씨를 가진 친구를 통해 나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 냉면 맛도 일품이었지만 여러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씨가 내 마음의 염증을 시원하게 날려 주었다.

상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날이 오면 그 친구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는 연극판에서 그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원한 냉면을 만들지만 열정은 뜨거운 친구에게서 따뜻한 세상의 한 면을 보았다.

<대명 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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