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고봉산은 참으로 거대한 산이었다. 구름으로 둘러싸인 그 정상은 숭고의 미를 띠고 있었고, 초등학교 소풍에서나 올라갈 수 있었던 산이었다. 난방 자재가 귀할 때 낙엽더미를 땔감으로 공급해주던 살림터였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차가운 계곡 물을 내려보내 벌거벗은 몸을 시원하게 해주던 친구같은 산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산 정상에 철조로 된 이상한 탑이 세워졌고, 그것이 북한에서 오는 방송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어떻게 저 꼭대기까지 그 무거운 철물을 옮겼으며, 어떻게 저 높은 탑을 그곳에 세울 수 있었을까 하는 경이로움과 호기심이 어린 마음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그 탑은 왠지 주변과 이질적인 모습으로 다가왔고, 어린 시절의 보금자리를 불법적으로 강탈한 침입자로 여겨졌다.

조그만 면소재지인 일산에 신도시라는 이름이 첨가되면서 그 많던 논도 밭도 동산도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하나 남은 정발산은 야성을 상실한 채 동물원 우리에서 아양을 떨며 과자를 받아먹는 늑대의 신세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붕어와 미꾸라지가 득실거리던 실개천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고, 기껏 남아 있는 개울도 폐수 창고 역할만 하고 있다.

몇 천년의 시간을 지나면서 그 야생적인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동산과 개울들을 대신해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만든 호수공원이었다. 우리는 지금 시멘트 덩어리와 옮겨 심은 나무들로 치장된 인공의 공원에서 주말을 보내야 하지만, 옛적 그대로의 개천 길을 따라 걷고 나즈막한 동산에 오르내리며 만끽하는 즐거움에 어디 비교가 되겠는가. 인공의 미가 아무리 뛰어난들 어디 자연의 미에 비하겠는가 말이다.

서민들의 내집 마련이라는 달콤한 명목으로 천년의 산야를 시멘트로 만들어 버린 맹목적인 정책입안자들, 또 이들과 결탁해 나름대로의 짭짭한 수익을 챙긴 장사꾼들은 아직도 심에 차지 않은 듯 일산2지구를 지정해 고봉산마저 야금야금 갉아먹으려 하고 있다. 이 즈음에 시민단체가 고봉산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고, 산 주변에 문봉서원을 복원하며, 인근 늪지를 생태공원화 하려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일환으로 시민들 땅 한평사기운동을 추진한다는 이 간절한 호소에 대해 고양시와 해당 당국 그리고 지역 국회의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시민의 공복이라고 자처하며 한 표를 호소한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길래, 이런 운동을 시민들이 손수하고 있단 말인가. 생업에 전력을 기울여도 부족한 시민들이 삶의 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을 모색하기 전에 그들 스스로가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럼에도 이를 몰지각한 것으로, 안목이 부족한 것으로, 배부른 소리로 탓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정치적, 행정적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 이것은 곧 다가올 선거와 직결되지 않을 수 없다.

국제적인 박람회, 국제적인 수족관, 국제적인 호텔 등등의 유치와 건립보다는 고봉산의 정기를 회복하고, 그 주변의 생태를 보존하며,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을 다시 복원하는 일이 진정 국제적인 것임을 그들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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