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년 된 행주성당 4대째 지키는 류병한씨

행주성당 지켜온 류명환씨
 “머슴이 어찌…”
류병환씨(63세)는 자신의 얘기를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칭찬받으려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류씨는 현재 행주성당의 관리를 맡고 있다. 공식적인 자리는 아니다. 그가 이 일을 하는 것은 100여년 행주성당의 역사와 함께 증조부부터 4대째 이어온 신앙심의 연장선이다.

성당 마당에 있는 기도용 나무탁자를 만든 것도 그였고 종루를 고친 것도 그였다. 성당 일이라면 궂은 일도 마다 않고 ‘하느님의 종’으로 ‘성당의 머슴’으로 살았다. 행주산성 부근에서 음식점 ‘관청너머’를 운영하고 행주성당 신자 이송희(75) 씨는 “성당의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잘 건사하고 있다”고 류씨를 소개했다. 홍승권신부는 류씨에 대해 "언제나 묵묵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봉사하고 계신다"고 전했다.

그의 집안과 행주성당(주임신부 홍승권 대건안드레아)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었다.“저의 증조부는 행주공소 시절 초대 전교회장이었습니다.” 류씨의 설명엔 비로소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이야기는 서울 약현(중림동)성당 두세 신부가 행주에 공소를 개설하던 1899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세 신부는 증조부 류승로(가밀로)를 공소회장으로 임명하고, 신양학교의 교사도 겸하도록 했다. 신양학교는 교우 자녀에게 신학문과 교리공부를 가르쳤다.

<행주성당 100년 이야기>를 보면, 증조부는 나루가 번창하던 1800년대 후반 행주로 이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증조부는 공소를 정착시키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다. 류씨 일가도 차례로 영세를 받았다. 그렇게 시작된 행주성당과 류씨 가문의 인연은 100여년 동안 이어졌다.

초대 신부였던 김원영 신부(아오스딩)는 누구보다 증조부 류 회장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류 회장이 1916년 9월에 세상을 뜨자 갑작스러운 전교회장의 죽음에 교우들은 그가 늘 앉던 자리를 한동안 비워두었다. 행주성당에 초석을 놓은 사람에 대한 예우였다.

증조부에 이어 할아버지 류기정(베드로·1887~1969)도 성당 초대회장을 지냈다. 할아버지의 장남 류봉구는 신부가 됐다. 두세 신부가 증조부의 겸손함과 인품에 반해 자신의 본명을 그에게 물려주었던 것처럼 류 신부는 김원영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본명까지도 물려받았다. 류 신부는 류병환씨의 큰아버지다. 류씨의 아버지인 류용구씨 역시 사목회장등을 지내며 행주성당과 한평생을 함께 했다. 류병환씨의 형은 류병일 신부다. 홍승권 주임신부는 "대대로 맏아들을 봉헌하는 놀랍고도 대단한 가문이다"며 소개했다.

하지만 도시화와 이촌향도의 물결 속에 지금 행주성당을 지키는 류씨 가문은 손에 꼽을 정도다. “자손들은 이제 거의 없어요. 큰아버지 돌아가시고 아버지 항렬에서 저희 어머니만 살아계십니다.” 류병환씨를 제외한 6남매는 모두 외지로 나갔다. 사촌들이 30명이지만 겨우 류병운씨 한 명만 남았다.
100여년 세월, 많은 것이 변했지만 행주나루터 너머 한강만은 변함없이 유장하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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