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닌데, 갑작스럽게 사회에서 엄청난 관심을 갖는 것이 의아스럽긴 하지만 이제라도 관심을 갖는 것은 다행스럽다. 그러나 나는 최근 학교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호들갑에 과연 진정성이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나는 학교폭력에 대한 우리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세 가지를 들고 싶다. 첫째 원인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하는가, 둘째 학교폭력과 관련된 아이들에 대해 진심어린 애정이 있는가, 셋째 현 상황을 바꾸려는 절박한 실천 의지가 있는가.

해방 이후 우리 사회는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능력했다. 문학 평론가 황현산은 우리사회의 문제해결 방식을 두고 ‘덮어 가리기’라고 정의했다. 근대화 이후 우리 사회는 문젯거리의 근본적인 해결은 뒷전으로 미루고 오로지 문제를 덮어, 보이지 않게 하려고만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문제의 원인을 찾고,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누구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것인가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아닌지.

학생들의 폭력행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담임교사가 문제다, 문제를 덮으려고만 하는 학교가 문제다, 자식의 가해행위에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나오는 부모가 문제다… . 가해학생들에 대한 신상털기식 비난과 교육당국에 대한 책임 추궁은 무성하지만 정작 기성세대의 자기반성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여러 가지 원인진단이 모두 맞는 말이지만 무언가 허전하다. 왜 그럴까? 거기에 ‘나’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지금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사회의 공적이 되어 돌을 맞을 희생양이 아니다. 다 함께 희생양에 돌을 던지고 나면 마음은 일시적으로 후련할지 모르지만 실은 한순간의 분풀이 일 뿐 근본적 문제해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돌아보자. 우리 기성세대가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을. “넌 공부만 잘 하면 되”,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 봐”, “공부 못 하는 아이들하고는 놀지 마”, “평수가 작은 아파트 애들하곤 놀지 마”, “지금 친구생일이 중요해? 학교에서 야자나 해”, “맞벌이 부모를 둔 아이 하고는 친해지지 마”, “우리 애만 피해자가 아니면 상관없어”우리가 아이에게 심어주었던 마음의 씨앗이 결국 친구의 고통에 아무런 공감도 못하는 공감불능의 나무로 자라고 말았다.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하지 않았던 우리의 무관심과 내 아이만 괜찮으면 된다는 이기심이 공동체를 병들게 했고, 학생들은 거울처럼 병든 어른들의 세계를 가감 없이 반영했다. 아이들의 폭력 문화는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두렵지만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우리 아이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던 것은 이 험한 세상에서 잘 살게 하기 위해서,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그러나 지금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자. 아이들은 학교에서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지, 아이들은 학교에서 진정 행복을 느끼고 있는지를.

우리가 진정으로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아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 지금 어떤 아픔이 고여 있는지 헤아려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지금 아이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임을 깨닫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

 폭력의 피해 학생도 가해 학생도 모두 우리 사회의 미래를 짊어질 ‘나’의 아이들이다. 가해 학생들을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도록 서둘러 전학을 보내거나 빨리 감옥에 보내 사회로부터 격리시킨다고 해서 학교폭력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소외된 아이들을 우리 모두가 부모 된 마음으로 보듬고 어루만지지 않는다면 학교 폭력은 계속해서 우리 아이들을 희생시킬 것이다. 이제 성적표에 장식된 아라비아 숫자보다 우리가 외면해왔던 이웃에 대한 사랑, 믿음, 우정, 이해와 공감이 우리 아이들의 가슴 속에서 자라도록 행동에 나서야 한다. 남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보다 ‘나’의 책임을 인정하고, ‘나’로부터 행동이 시작되어야 한다.

2011년 8월 노르웨이의 한 극우주의자가 총기를 난사해 70여명이 청소년들이 사망한 충격적 사건이 일어났을 때, 희생자들의 추도식에서 한 젊은 여성 노동당원이 “한 사람이 저토록 큰 증오를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가 함께 했을 때 얼마나 더 큰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 고 했던 말이 아직도 내 마음 속에 뚜렷하다.

우리도 학교폭력에 대한 한순간의 분노보다 좀 더 근본적 성찰과 성숙한 대응이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