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종씨 5남매, 돌아가며 3년씩 부모 병간호

▲ 고병종씨 가족
장항동에서 공인중개사를 하고 있는 고병종(하임빌공인중개사 대표)씨를 만난 것은 2008년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는 학원에서였다. 다른 학원생들과는 달리 며칠에 한 번씩 학원에 나왔지만 교재 내용에 대해 물어보면 너무도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었다. 자주 수업에 늦었는데 항상 갓난아기를 목욕시키거나 아이 돌보기, 혹은 아버님 목욕시켜드리고 시중들다 오는 이유가 대부분이었다. 남자지만 엄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자주 표현했으며 그래서 자신은 집사람에게 잘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자들의 삶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라 했다. 평범했던 그가 이렇게 변화되기까지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고병종씨는 아버지가 1982년 뇌경색증상으로 쓰러지기를 반복하면서 모든 삶이 달라졌다. 
 
별밤 프로에 풀빵장수 사연 채택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의대에 입학했던 고병종씨는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그만 두었다. 집안의 생계와 네 명의 동생들도 한창 학생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군복무를 마치고 아버지 병원비와 동생들의 학비를 벌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찍 군대에 갔다 왔다. 또한 두 살이 어린 남동생도 곧바로 군에 지원하여 9개월 차이로 군에 입대했다. 군 제대 후에도 아버지는 입원과 수술이 반복됐다.

▲ 아버지와 함께 찍은 옛날 가족사진
병원비와 가족의 생계비 외에도 동생들의 학비가 필요했다. 물론 어머니가 식당 일을 하면서 아버지 뒷바라지를 했다. 하지만 항상 부족해서 제대한 동생과 머리를 맞대고 많은 생각을 했다. 고씨는 막노동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 시절 많은 학생들이 열광하며 듣던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라디오 프로에서 풀빵 장사 할 수 있는 리어카가 필요하다는 사연이 채택됐다. 그 사연으로 인해 청취자들로부터 리어카 2대와 스마일 빵을 구울 수 있는 밀가루 2포대와 2주 동안 빵 굽는 기술을 전수 받는 행운이 찾아왔다. 그때 주거지가 광주라서 동생과 전남대 정문과 후문에서 각각 풀빵 장사를 했다. 80년대였던 그 시절 시국이 시끄러워 시위가 있을 때마다 시위를 피해 리어카를 끌고 다녔던 기억도 난다. 많은 동년배 대학생들의 도움으로 장사는 그런대로 잘 되었고, 때로는 강의가 없는 시간에 여학생들이 나와 장사를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 돈으로 집에 전화도 놓고 집세도 낼 수 있었으며 동생들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 아버지와 함께 했던 나들이
남동생과 휴학 복학을 반복하며
그 후로 고병종씨와 남동생도 법학과에 다니게 되었고 휴학과 복학을 번갈아 가며 하면서 대학교를 졸업하게 됐다. 그동안 셋째인 여동생도 물리대 교육학과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면서 방학 때면 식당에서 학비를 벌었고 또한 넷째 여동생도 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아버지 병원비와 학비, 생계비 모든 것이 벅찬 시절이라 다들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다녔지만 그 비용도 충당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다섯째도 남동생도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고, 힘든 형편으로 인해 넷째인 여동생이 학교를 그만 두고 국회의사당에 취업을 하면서 학업을 그만두게 되었다.

지금도 그 넷째 동생이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끝내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던 것이 지금까지 아쉬움으로 남았다. 물론 그 동생은 지금 KT 과장으로 나름대로의 멋진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오빠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고 미안하다. 그동안 아버지를 병환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으며 병원비를 부담도 더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둘째 여동생이 교사가 됐고, 거꾸로 여동생들이 오빠들의 학비를 보태게 되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일하고 공부하고 정신없이 보냈던 시간들이었다. 낮에는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를 도와드리는 생활이 일상이 되었었다.

5남매 중 장남이 제일 늦게 결혼
그동안 동생들이 하나씩 결혼을 했다. 그러나 고병종씨는 자신의 처지상 다른 누군가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생각지 못했다고. 10년전 나이 40세가 되어서야 지금의 집사람을 만났다. 모든 것을 알고 결혼을 했지만 시아버지 병수발은 쉽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아버지 병수발을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땄다.

그동안 아버지는 8번의 뇌수술을 받았고 병간호와 생계비를 충당하시던 어머니마저 무리한 노동으로 척추수술을 받게 되면서 더 심한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차례차례 동생들의 학업도 끝마쳤지만 매월 들어가는 병원비는 큰 부담이었다. 10년 동안 아버지 간병을 했던 어머니도 더 이상은 아버지를 돌보기 어렵게 됐다. 형제들이 3년씩 돌아가며 어머니, 아버지를 돌보기로 했다. 고병종씨가 3년, 법률구조공단 서기관인 첫째 남동생 가족이 3년, 정발고 교사인 여동생 가족이 3년을 간호를 맡았다. 3년이란 짧지 않았지만 남다른 형제애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4월 편안하게 돌아가시다
고병종씨의 아버지는 4월 가족들 곁을 떠났다. 가족들은 아직도 아버지와 일상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의 부재가 실감나지 않는다고. “기저귀도 봐 드려야 할 것 같고 뇌척수 배액관 상태를 점검해 드려야 할 것 같고.” 아버지 뇌척수 배액관이 수시로 막혀 응급처치 후에 응급실로 실려 가고, 수술하는 일이 일이 많았다. 배설, 배뇨, 욕창 등 참 가족으로서도 쉽지않은 일들.

아버지는 가끔 명료한 정신으로 자신의 상황을 힘들어했다. 그 많은 수고에도 어머니는 본인이 병수발을 원하며 아버지를 시설로 보내지않았다. 고병종씨 가족은 아버지의 병 상태, 가족의 소식을 서로가 알기 쉽도록 카페를 만들어 의견을 나눠왔다. 덕분에 멀리 있는 형제들까지도 모두가 곁에 있는 것처럼 그 근황을 모두 알고 살고있다.

아직까지 고병종씨 형제들은 자기 집을 마련하지 못했다. 고병종씨는 “동생들이 다들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지만 그동안 자신의 재테크보다는 부모님의 일에 더 앞서서 나서준 탓인 것 같아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막내 동생인 고병권(교수)씨와 아내도 남을 돕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시절에는 다들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고병종씨. 어려운 상황을 가족들이 하나가 되어 헤쳐나가는, 요즈음 흔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 가정의 달, 평범한 우리 이웃에게서 행복한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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