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일산의 신도시 발표와 개발로 고양은 요동치기 시작했으며, 오늘까지도 개발은 이어지고 있다. 근현대사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으로는 1909년 경의선 철도의 부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확고히 하기위한 서울에서 일산, 개성, 평양,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 철로를 부설했다. 그 결과 한적한 농촌지역 이였던 곳에 상권이 형성되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철도 부설이전의 한강을 이용한 전례장시는 자연스럽게 퇴보하면서 일산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장시문화가 탄생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겪고 한강제방을 축조함으로 또 하나의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다. 을축년 홍수당시 한수이북(고양포함)의 강우량을 살펴보면 443.5㎜ 전국 평균 강우량 300㎜보다 많은 양의 비가내린 것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한강에는 제방이 없었으니 그 피해는 엄청나게 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현재의 고양시청이 있는 주교리(배다리)에도 물이 넘쳐 아랫배다리 윗배다리를 놓아 건너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일제는 몇 차례에 걸친 홍수로 인명과 재산피해가 심각하자 수방대책으로 한강제방을 축조하는 것이었다. 한강제방을 가리켜 고양사람들은 ‘대보뚝’이라 호칭한다. 한강제방 축조는 모두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일제는 의도적으로 공출을 과다착취했다. 당시 본토에서는 식량부족으로 폭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전쟁 확대를 위한 군량미 조달은 필수로 공출을 과다 책정하는 방법으로 식량을 강탈해갔다.

그 결과 한강제방공사는 기간이 연장되는 등 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큰 사건이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이 크긴 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고양의 가장 큰 변화는 1989년4월27일 고양(백석, 마두, 일산, 장항, 주엽, 대화일대)지구에 신도시건설 발표가 된 후 1990년부터 시작된 신도시 개발 사업일 것이다. 그런 와중에 1990년 9월12일 새벽 3시 한강제방이 터져 능곡, 일산, 원당 등 고양시 한강주변 전역이 물에 잠기는 수마의 참변을 을축년 대홍수에 이어 또 맞이하게 됐다.

 고양시(당시고양군) 일산에 신도시가 들어서게 되어 1차 지표조사를 보고서를 1989년 12월 마친 후 고양시민의 요구로 1991년 5월 부터 고양사람들의 향기와 채취가 남아있는 자연환경과 옛 모습을 찾는 발굴조사를 다시 착수했다. 그러나 발굴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조금 남아 있던 고 성터(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가 포크레인에 의해서 사라진 것은 안타깝다. 그러나 신도시 토목공사가 진행되는 바로 옆에서 구석기시대 뗀석기들을 찾았고, 토탄층 아래에서 신석기 시대의 토기가 나왔고, 토탄층에서는 4~5000년전의 볍씨와 곡식류를 발굴했다. 위쪽 토탄층에서 청동기 시대의 민토기들을 찾은 것은 소중한 발견이다. 그 윗 층에서는 개의 윗 앞니, 소뼈, 집짐승의 배설물에서 자라는 소뚱 구리들이 나와 그시기를 엿볼 수 있는 대단한 성과인 것이다.

1991년 추가 학술발굴조사결과 5~4천년전으로 추정되는 볍씨가 보고되면서 한반도의 벼 농사의 기원과 전례에 대한 새로운 학설의 근거를 제공했다. 당시 대화 4리 가와지(성저마을)는 조사결과 토탄층에서 드러난 자연유물을 통한 후빙기 자료와 볍씨를 층별, 깊이별 절대연대측정 자료를 얻고, 검은 토탄층이 쌓이던 BC 2400~3000의 시기에 소와 개를 기르며 농사를 짓고 살았던 마을이 있었음을 밝혀준다. 또한 이층에서 출토된 우과(牛科)동물의 긴뼈를 이용하여 만든 뼈 연모와 개의 윗 앞니는 집짐승 기르기에 대한 뚜렷한 증거로 나타났다. 이곳에서 출토된 볍씨가 있는데 볍씨가 들어난 층의 절대연대는 넓게 잡아서 4000~5000 BP 사이에 해당된다. 가와지지역 내용물(볍씨)는 방사선탄소연대측정을(미국 BETA연구소)한 결과4330±80B.P(B. C3310~2660)이었다. 토탄층 아래 모래층에서 출토된 석기들은 구석기시대 수법을 보이는 뗀석기들로 후기구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됐다. 새말층에서는 회청색토기, 적갈색 토기, 타날문 토기 등 철기시대와 그 뒷기를 특징짓는 유물들이 나왔다. 가와지 유적에서 발굴된 12점의 볍씨는 청회색의 흙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외형이 비교적 잘 보전된 상태였다.

일본의 산케이(매일신문)신문과 영국의 BBC가 대대적으로 보도한바 있다. 산케이 신문은 가와지 출토 볍씨 기사에서 “한반도에서의 도작이 5000년전까지 올라가는 것은 지금까지의 상식을 뒤집는 발견으로 앞으로 일본의 연구진도 참여하여 공동 연구를 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보도했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고 하듯 5000년의 유구한 역사는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 높은 문화유산을 곳곳에 간직하고 있다.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자칫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질 번했던 5000년전 가와지 볍씨의 출토는 경이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고양시승격 20주년과 고양60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5000년 전의 검은 토탄속의 광명이자 새로운 발견인 가와지 유적의 한·중·일 학술발표회를 개최 교류를 넘어선 농사의 기원과 전례 경로에 대한 새로운 학설과 해석을 통해 자랑스런 우리의 유산이 곳 세계의 유산이란 수식어가 되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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