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그뫼에서 시집 온 임복녀 할머니 100세 잔치

▲ 가족들과 함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23일, 자유로 구산IC에서 빠져나가 논길을 끼고 잠시 달려가니 저기에서 흥겨운 음악소리가 들린다. 벌써 임복녀 할머니 백수연이 시작되었다. 구산동 장월마을이 생긴 이래 첫 백수연이다. 그래서 임복녀 할머니 백수연이 동네잔치가 됐다.

넓은 마당에 마을 남정네들이 모여 앉아 잔치음식을 먹고, 통돼지라도 한 마리 잡았는지 고기굽으며 나는 진한 연기가 바람 따라 흘러다니며 식욕을 돋군다. 창고에서 틀어놓은 흥겨운 노랫가락에 어깨가 들썩이니, 이것이 마을 잔치다. 

▲ 임복녀 할머니
바로 옆 동네인 거그뫼에서 시집왔다는 임복녀 할머니. “내가 몇 살에 시집을 왔나? 17살인가 18살인가?”라며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답답해한다. 기억력이 많이 감퇴했다고 걱정하면서도 “우리는 젊을 때 난리를 몇 번이나 겪었는지 몰라”라며 돈을 갖고 있어도 쌀을 살 수 없었던 전쟁 때 이야기부터, 77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까지 해줄 이야기가 꽤 많아 보이니 기억력 걱정은 안해도 좋을 것 같다.

백수연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송포농협 이재영 조합장은 임복녀 할머니에게 금일봉을 전달하며 100세까지 무병장수한 것을 축하했다. 이재영 조합장은 할머니뿐만 아니라 할머니가 건강하게 사실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한 자녀들도 칭찬받아야 한다며 “앞으로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있으면 계속하여 축하할 계획”이라고 한다.

수리조합이 되기 전 장월마을은 지독하게 살기 어려운 동네였다. 유호영씨에 따르면 “1925년인 을축년에 대홍수를 겪은 후 한강 제방을 쌓았고, 그래서 만들어진 곳이 장월”이다.

마을이 생기기전에는 ‘소펄’이라고 불렸고, 장산마을 너머에 생긴 곳이라고 하여 장월이라 불렸던 이 곳은 해방전까지 대부분 일본인 소유지였고 해방후에는 ‘신한공사’에서 점유하고 관리했던 곳이다. 벼, 옥수수, 수수를 주로 심었지만 늘 물이 끼고, 가뭄이 들어 벼 1마지기 농사지어 ‘벼 네가마 얻으면 잘 나온 것’이라고 했을 정도라고. 농지개량조합이 생긴 후 수리안전답이 되고, 경지정리가 이루어지면서 농가소득이 높아져 살만해진 곳이다. 

이 동네 우물은 철분이 많아 식수로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한강물을 길어오거나 산남리에서 식수를 길어와야 했다. 먹을 것, 마실 것, 땔 것 어느 것 하나 충분한 것 없던 마을이었다.  

▲ 송포농협 이재영 조합장의 축하를 받으며
이런 마을에서 난리를 몇 번씩 겪어가며 3남 2녀를 잘 키워낸 임복녀 할머니. 맏며느리인 조금자씨는 “어머님은 지금도 밭에 나가서 풀 뽑으시고, 뭐든지 잘 잡수시며 6.25전쟁 얘기를 자세한 것까지 얘기해주신다”며 시어머니의 건강을 부러워하는 눈치다. 손님 대접에 정신없는 장남 김정웅씨 역시 임복녀 할머니 옆에만 오면 싱글벙글 웃는다. 뒤늦게 찾아온 사람들은 할머님께 단체로 절을 하며 축하해준다.

마을이 생긴이래 처음 갖는다는 백수연. 마을 주민들 모두의 잔치가 된 이 날, 시골동네에 아직까지도 정겹게 남아있는 경로효친사상을 느낄 수 있어 더 기뻤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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