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3년 이후 조선의 수도 배후에서 필요를 충족

내년은 ‘고양(高陽)’이라는 지명이 사용된지 600주년이 되는 해다. 태종 13년(1413년)에 이르러 고봉(高峰)과 덕양(德陽)을 합쳐 ‘고양’현 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이 문헌상 처음 등장한 것이 조선왕조실록 태종13년 3월 23일 2번째 기사기록이다. 이날 태종은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고양에 현감을 설치하고 원당리에 고양의 치소(治所)를 두었다. 당시 고양현의 경계는 동쪽으로 양주까지 6리, 서쪽으로 교하까지 30리, 남쪽으로 한강까지 15리, 북쪽으로 원평(파주)까지 15리였다.

고양은 이전 삼국시대에는 ‘달을성현’, ‘개백현’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 때 ‘고봉’, ‘행주’로 불렸었다. 고려시대에는 고양지역이 양주의 속현으로 있었다. 1413년 이후 고양은 어느 지역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 행정지역으로 탄생해 오늘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고양은 1413년 이후 600년 가까이 조선시대에 어떠한 역사문화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조선시대 고양은 교통의 요충지, 군병력의 요충지, 권문세가 묘역이 자리한 곳 등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 일산동구 산황동에 있는 650년 수령의 느티나무. 무학대사가 한양 천도 계획중 명당자리에 심은 3본 중 1본이다. 내년 600년을 맞이하는 고양이 잎이 위로 피면 풍년이 든다는 이 나무처럼 번영하기를 기대해본다.

중국으로 오가던 사신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땅 
조선시대 고양지역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우선 어수선한 조선왕조 초기 수도인 한성과 고려왕조의 수도였던 개성을 연결하는 교통의 길목으로 역할을 했다. 고양시향토문화재 정동일 위원은 “태조 이성계의 왕비인 신의왕후의 묘가 개성인근에 있었는데 한양에서 개성으로 참배를 갈 때 머무르던  곳이 바로 고양”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당시 중국 명나라나 청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서북로의 첫 관문으로서 고양이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은 보통 한양을 떠나면 고양-개성-평산-황주-평양-의주-압록강-산해관-북경의 육로 3100리에 50일의 일정을 잡았다.

반대로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에도 한양에 들어오기 전 중국 사신은 반드시 벽제관에서 하루를 묵었다. 이때 임금이 사신을 맞이하는 관인을 보내 사신의 노고를 위로했다. 사신 일행의 여비는 국내 경유지 인근 고을의 부담이었기 때문에 사신의 일행이 지나는 길목에 있었던 고양현감은 부담이 컸을 것이다.

사신 일행의 핵심은 보통 정사·부사·서장관의 세 사람인데 이들은 현재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홍제원에서 관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중국이 향을 향해 떠났는데, 그 첫 정착지가 고양의 벽제관이었다. 정동일 고양시향토문화재 위원은 “사신들이 말을 타고 숯돌고개와 박석고개를 넘어 벽제관으로 빠져나갔다”고 말했다.

▲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기 하루 전에 반드시 객사에 유숙하였던 벽제관. 벽제관은 고려 때부터 있었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 세종 때 크게 개축했다.

숱한 외침에서 한양 방어의 배수진이었던 땅
군사요충지로서의 고양을 증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 북한산성이다. 지금 남아 있는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37년(1711)에 축조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 도성을 적에게 내어준 것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저항하다가 치욕적인 항복을 당한 역사에서 효종은 북벌계획을 구상했고, 북한산성은 그 구상의 현실적 재현이었다. 그러나 축성 반대론도 만만치 않아 숙종때에야 본격적 축조가 이뤄진 것이다. 북한산성은 1711년 2월 축성하기로 결정하고, 4월 3일에 착공하기에 이르렀으며, 6개월의 공사로 10월 19일에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공사는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3군문 군사 외에 한양의 주민들도 동원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 이전 고양지역에서 숯돌고개 전투, 벽제관 전투가 일어난 것으 보아도 수도 한양의 외곽수비 근거지였던 고양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정동일 위원은 “한양 도성을 지켜기 위해 배수진을 친 곳이 고양이었고, 행주대첩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왜군들이 한양으로 압박해들어왔지만 서울 인근 부대 하나를 박살 내기 위해 왔다가 오히려 대패하고 돌아간 곳이다”고 말했다.

고양이 행주대첩의 현장을 지닌 곳이라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세종 때 군사훈련장이 되었고, 연산군 때는 수렵장이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세종 이후 조선시대 왕이 친히 말을 타고 여러 신하들과 실시하는 군사 훈련 성격의 수렵대회 장소로 고양이 이용되었다. 군사훈련 때 왕을 따르는 수많은 관료와 병정들이 동원되므로, 이 일대의 벼와 곡식이 밟히는 등 폐단이 적지 않았다.

연산군 시절에는 고양이 군사훈련보다 수렵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덕양구 대자동 산 10-2번지에 위치한 연산군 금표비에는 ‘금표 내에 들어온 사람은 (당시 벌률인) ’기훼제서율’의해 처참한다‘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금표비는 1980년대 중반 성종의 증손인 금천군 이변의 자손들이 이 인근에서 묘역 정화 사업을 벌이던 중 발굴되어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이 금표비는 연산군 10년인 1504년 연산군이 지금의 고양을 비롯해 파주 양주 광주 시흥 김포 등 도성외곽 경기도 일원에 세운 경계표시로 왕과 호위병사 궁녀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금표비를 세상에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백성들이 만약 금표 지역으로 들어가면 국가 물건을 훼손한 사람으로 여겨져 처참하게 처형당했다”고 말했다.

▲ 덕양구 대자동에 위치한 연산군 금표비는 폭군 연산군의 유흥지의 경계를 알리는 것으로 왕과 호위병사 궁녀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일반 백성이 이 경계 안에 들어서면 죽음을 면치 못했다.


조선을 통털어 권문세가가 가장 많이 묻힌 땅 
조선시대 고양은 왕릉을 비롯한 권문세가의 묘역으로 더할 수 없는 좋은 위치에 있었다. 고양이 권문세가 묘역으로 선호된 이유는 당시 한양 도성에서 100리 내에 왕릉을 마련하게 되는 예에 따라 양주·광주·김포 등과 더불어 그 대상이 되었다. 정동일 위원은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 심씨가 52세의 나이로 죽자 지금의 서초구 내곡동 인근에 묘를 정했는데 이곳으로 향하던 장례행렬이 한강을 건너던 중 배가 뒤집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후 한강 이남보다 이북에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많이 생기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소헌왕후 심씨와 세종의 묘는 지금의 여주 영릉에 합장묘로 위치해있다.

고양에는 일단 양주의 동구릉 다음으로 큰 왕릉군을 형성하고 있으며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다. 국가사적 198호인 서오릉은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 8대 예종과  계비 인순왕후의 능인 창릉, 19대 숙종과 제1계비인 인현왕후와 제2계비인 인원왕후의 명릉,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능인 익릉, 21대 영조와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을 일컫는다. 국가사적 200호인 서삼릉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인 희릉, 인종과 부인 인성왕후 박씨의 능인 효릉, 철종과 그의 비인 철인왕후의 무덤인 예릉을 말한다.

특히 서삼릉 경내에 위치한 소현세자, 의소세손, 문효세자의 무덤인 3원과 46묘, 태실 54기이 모아져 있다. 원래 왕릉에는 후궁, 왕자, 공주의 묘를 쓸 수 없는데도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일제가 멸망한 조선왕실의 무덤을 집중관리한다는 명목에 의한 것이다. 안재성 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장은 “이렇게 왕릉과 함께 있을 수 없는 후궁, 왕자, 태실이 모여진 것은 무덤 경내를 공동무덤으로 변형시켜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낮추기 위한 일제의 의도적인 계획의 소산”이라고 말했다.

고양에는 인조의 장자로 개혁군주의 소질을 보였으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소현세자의 묘인 소경원, 태종의 넷째아들로 역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성녕대군 묘 등을 비롯하여 왕자·빈·후궁·왕녀들의 묘가 수십 기 흩어져 있다. 권희, 이무, 신광한, 황치신, 김주신, 김명원, 민순 등 조선시대 명신들의 묘역 수백 기가 자리하고 있다.

이외에도 고양은 조선의 수도 한양이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주는 보조역할도 했다. 한양에 서 급히 필요한 물자가 조선의 각 지방에서 운송되는 동안 물품이 상하거나 유실될 경우도 있었던데 반해 고양은 신속하게 물자 제공이 가능했던 지역이다. 정동일 위원은 “한양에서 필요로 한,  행주 인근에서 많이 잡히는 웅어를 비롯해 뗄감, 갈대, 풀, 옻 등이 많이 제공됐다”고 말했다.

고양은 한양의 중앙정치에 굉장히 민감했던 지역이기도 했다. 특히 형벌에 있어 왕의 의중이 직접적으로 전달된 곳이었다. 다른 곳 같으면 형을 집행하러 가는 도중에 왕의 마음이 바뀌어 형벌을 감해줄 수 있었던 반면 고양은 그렇지 못했다. 정 위원은 “왕으로부터 정치적 미움을 받아 고양에서 유배생활을 한다면 곧 한양과 지근거리였던 만큼 그 신하는 죽음과 가까이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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