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촌 18단지 '취강서실' 취강 김종근 선생

▲ “無汗則不成(무한즉불성/땀이 없으면 이룰 수 없다)은 요즘 시기에 꼭 필요하다”는 김종근 선생

“나약한 마음을 다스리는 정신교육에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 심성이 나약해 어떠한 난관에 부딪힌 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일들이 사회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옛날 학자들의 지혜를 모은 ‘명심보감’을 비롯해 심성발달에 도움되는 서예를 33년의 경험으로 열정을 쏟고 있는 취강 김종근 선생(53세).

1970년대 어려웠던 시절은 김일 선수(작고/레슬링)로 인해 국민들이 힘을 얻었던 때가 있었다. 취강 선생은 그 김일 선수와 같은 고향(전남 고흥)의 한 동네에 살았다고 말한다.

20대 초반에 선배집을 방문했는데, 책꽂이에 꽂혀있던 서예책에 저절로 눈길이 갔고 마음에 끌림 현상이 일었다. 선배집에서 서예자료를 가져와서 신문지에 붓글씨를 쓰고 또 쓰는 것을 본 부친은 배고픈 일을 하지말라며 심하게 반대했다.

그럴수록 마음 속 한 구석에서 서예에 대한 갈망이 간절히 일어났던 이유는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아버지까지 필체가 좋아서 마을 이장까지 했고, 오래된 벼루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취강 선생.

군 제대를 한 1980년대 초 전남 고흥에서 부산으로 가 본격적으로 서예를 시작했다. 마치 바다에 정처 없이 떠다니다가 대형선박을 만난 듯 안정감을 찾았고, 저녁에 서예 학원을 다니기 위해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마음 속 에너지가 용오름처럼 샘솟기 시작해 잠을 안자도 피곤한 줄 모르고 몰두했다. 이토록 오롯이 서예에 푹 빠졌기에 2년 만에 부산서예대전에 입선했다. “주변에서 깜짝 놀랐으며 응원과 격려가 쏟아졌다”고 하는 취강 선생. 더 큰 꿈을 위해 부산 스승의 강력 추천으로 묵향의 고향인 전남 광주로 갔다.

이곳에서도 새벽 4시에 막걸리, 신문 배달 등 온갖 알바를 했고, 대학을 들어갔지만 서예가 더 흥미로워서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서예 학원에서 생활했다. 하루 200×70사이즈(500~1000자 분량) 7~9장을 썼다.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가가 되기 위해 젊은 청춘을 오직 붓과 먹, 그리고 글씨로 보냈다. 호가 되는 취강은 ‘늘 푸른 강물처럼 변함없이 한길로만 가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했다.

공모전에도 없었던 ‘전각(돌에 날카로운 칼로 글을 새김)’도 이미 1980년도에 했고, 이때 엄지손가락에 영광의 상처를 입었다.

광주에서는 세 분의 스승 밑에서 8년 가까이 빈틈없는 가르침을 받았고, 국전을 보기 위해 서울 예술의 전당으로 학원생들과 함께 관광차를 타고 왔다. 또 다른 넓은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며 마음을 끌어당겼다. 광주 스승께 양해를 구했고, 결국 추천을 받아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에 와서 묘한 인연으로 고향 후배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2남1녀의 자녀를 뒀다. 자녀들은 유치원 시절부터 지하철을 타고 그가 생계를 운영하던 서예 학원에 놀러다니며 배웠다. 취강 선생은 “어릴 적 환경이 참 중요함을 요즘 들어서 더 느끼고 있다. 심성이 곱게 자라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로 큰 것이 너무나도 고맙다”고 했다. 그는 8년 전 마당이 넉넉한 고양의 법곳동 전원주택으로 옮겨왔고, 주엽동에서 한글, 서예, 문인화, 전각, 펜글씨 등을 가르치는 서실을 운영하며 인성교육에 열정을 쏟고 있다.

금산 나영만 선생(부산/탤런트 나현희 씨 부친), 송곡 안규동 선생(작고), 운암 조용민 선생(광주), 당대 행·초서 대가 월정 정주상 선생(서울)으로부터 사사받았다.

취강 선생은 “어릴 적부터 예의범절이 들어있는 고전학문을 배우면 인성교육에 도움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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