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에 종묘상에 갔는데 땅콩 모종이 있어 12그루를 사다가 손바닥만 한 귀퉁이 밭에 심어 가꿨다. 가물 때는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어 정성스레 가꾸었더니 잘 자랐다. 파란 잎사귀에 노란 꽃이 화초처럼 예뻐서 지나가던 마을 할머니도 땅콩이 잘되었다고 부러워하였다. 그러니 자연히 9월 초엽이면 얼마간 수확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생겼다.

그런데 8월 말엽 그동안 미뤄 놓았던 밭두둑의 풀을 베다가 충격적인 사건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땅콩나무 밑 둘레가 파헤쳐져 있고 땅콩 나무 곁엔 땅콩 껍질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것이었다. 완전히 파먹은 것이 8그루이고 나머지도 반쯤은 파먹은 상태였다. 한눈에 야생동물의 짓이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토록 정성들여 길렀는데 이렇게 야만스런 짓을 하다니…!’ 상실감이 몰려왔다.

집사람에게 이 말을 했더니 “어제 아침 무렵 들깻잎을 딸 때도 멀쩡했는데…!”라며 속상해 했다. 그렇다면 범인은 분명 어젯 밤에 일을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 ‘어떤 놈이 이런 못된 짓을 한 것일까?’

제일 먼저 야생고양이인 노란 고양이와 회색고양이가 의심이 갔다. 둘 다 우리 집과 텃밭 주위를 주 무대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엔 부엌 너머 베란다 창문 옆에 대량의 배변을 통해 먹이를 주지 않는다고 무언의 시위까지 한 놈들이라 부쩍 의심이 갔다. 그러나 고양이가 땅콩을 파먹는다는 소리는 아직 듣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범인으로 지목 할 수 없었다.

다음으로 의심 가는 놈이 까치였다. 까치가 땅콩을 잘 먹기에 ‘저놈이 그랬을까?’ 생각했지만 증거가 불충분했다. 땅을 파헤쳐 놓은 솜씨가 아무래도 까치의 가는 발보다는 좀 더 굵은 발로 파헤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목된 놈이 청설모였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한 일주일 전에 우리 집에 무단으로 들어와 제 집인 양 현관문에서 작은방으로 유유히 들어와 있어 창문을 열어 겨우 내보낸 놈이었다. 설치류는 가을에 견과류를 물어다 숨겨 놓았다가 겨울철에 먹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의심이 부쩍 일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가을철도 아닌데 왜 땅콩밭을 파헤쳤을까하는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그래서 범인으로 확정을 지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너구리를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해달라고 전남 신안의 농부들이 청원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 피해를 당한 모습이 우리 땅콩밭 피해상황과 흡사하였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너구리를 범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범인을 잡으면 패주기라도 할 터인데 그러지 못하니 고작 “이 못된 놈 배탈이나 나거라!” 악담만 한다. 12그루 땅콩 나무에서 얻어지는 수확이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당해보니 기른 정성을 돈의 수치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땅콩 도둑보다 더 못된 사람이 많은 게 현실이다. 남이 정성들여 길러놓은 아이를 성폭행하는 파렴치범도 그런 류에 속한다 할 것이다. 야생동물에게 땅콩을 도둑맞아도 이처럼 상실감이 드는데 사람에게 못된 짓을 당하면 그 상실감이 얼마나 더 클까! 이런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가 하루빨리 만들어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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