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묵 장항1동 주민자치위원장

고봉산 자락에 살고 있던 노루들이 한강으로 물을 마시기 위해 다니던 길목이라 해 장항이라고 했다는데, 요즈음에는 고라니가 더 많이 보인다. 고양시에서 가장 낮은 저지대인 이 동네 이름이 멋스럽다. 신도시 개발 이전에 이곳은 한강하류의 퇴적으로 이루어진 땅이어서 농사가 매우 잘 되던 곳. 개발 이후 1800여 개 업체가 자리 잡고 있는 고양시 최대의 장항기업인단지가 있고, 고양시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곳이기도 하다. 

옛날에 마포나루로 싣고 가던 소금을 부려놨는데 어찌나 많았던지 산처럼 쌓여있어서 붙여졌다는 산염(山鹽)마을에서 60여년을 살아온 피난민 2세대 한종묵 장항1동 주민자치위원장. 황해도 연백군 훈산면 대화리에서 살다가 6.25전쟁이 나자 이곳으로 왔다. “한강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여기 주저앉지 않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려 했다”고 한다. 끊어진 한강철교가 이어준 인연이다. “여기는 죄다 갈당(갈대)밭이었고, 배수가 안되서 비만 오면 물이 끼는 내버리는 땅”이 많았단다. 남의 농사를 지어가며 내버리는 땅을 장만하고, 목수일을 배워 자식들을 길렀던 부친의 노력 덕분에 맨 몸으로 정착한 이곳에서 지금은 모두들 자리를 잘 잡았다.

장항1동은 1990년 수해로 한강제방이 터졌을 때 큰 피해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여기 주민들은 언젠가는 한강제방이 터질 거라고 예상을 했다”며, 비만 오면 주민들은 소, 돼지를 끌고 한강제방으로 올라갔었단다. 90년 수해 때도 걱정을 했지만 소, 돼지 끌고 피난가는 일에 이골이 나있던 주민들은 터질 거라 생각은 하면서도 막상 이때는 피하지 않고 있다가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가족들 사진, 집문서만 챙겨가지고 백마초등학교로 피난을 갔다”는 한종묵 위원장. 그래서 지금도 장항동 옛 사진을 많이 갖고 있다.

한강제방 붕괴 후 삶의 터전을 잃은 장항동 주민들을 위해, 그리고 신도시 개발로 물류단지의 필요성이 결부돼 이곳 농토를 용도변경할 수 있는 기회가 합법적으로 주어졌다. 한상묵 위원장도 한 트럭당 2만 5000원씩 들여 넓은 논을 메꾸었고, 용도변경해 창고임대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문제는 ‘소득원도로’를 사이에 두고 자유로 쪽만 용도변경 허가를 한 것이다. 피해는 똑같이 입었지만 혜택에 있어서는 차별이었다. 현재 장항1동의 가장 큰 숙원사업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주민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마을축제를 개최하기 어렵고, 주민문화센터 역시도 서예, 노래교실, 단전호흡 등을 운영할 뿐 다른 여타 프로그램을 개설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대부분 공장지대에서 낮 시간에 근무하는 외부인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장항1동 주민들이 가장 큰 바람이  ‘소득원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포장하는 것이다. 이미 15년이 지난 숙원사업이다. 700~800억원이라는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는 사업이기에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2자유로에서 장항1동으로 내려오는 길이 기존 도로와 연결되지 못하고 끊어져 있는 것이 문제다. 한종묵 위원장은 “웃기지도 않는 길”이라며 속히 기존도로와 연결해서 그나마 교통체증을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JDS 명품도시건설을 위해 규제를 해왔다가 사업을 포기했다면 그동안 피해를 생각해서라도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 또 다른 주장이다. 농사지으려면 봄이면 거름을 펴야하는데 그때만 되면 신도시주민들로부터 민원이 많이 발생한다. 

10여년전만해도 오순도순 살던 장항1동 주민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 위화감이 너무 커졌다. “삶의 의욕도 안생기고, 서로 얼굴 붉히며 보이지 않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얼굴도 안보려하는 사이가 됐다”며 “같은 마을을 갈라놓는 행정”이라고 답답해한다.

1991년 동사무소가 들어왔다. 한종묵 위원장은 그 당시 동정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마을일에 앞장서 봉사해왔다가 주민자치위원장이 됐다. 배, 복숭아, 사과, 밤, 매실 나무 등 400여 그루를 종류별로 재배하는 그는 취미활동 할 새가 없다. 함께 마을일 하는 봉사자들과 한 잔 술을 건내며 세월을 낚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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