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경기도 파주시의회에 강연하러 갔다가, 그곳에 사는 고교시절 친구를 오랜만에 연락해 만났다. 3년 동안 같은 교실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절친”이었다. 학창시절 멀리 파주에서 서울까지 기차통학을 하던 친구였다. 고교졸업 후 각자의 길을 가느라, 자주 연락도 못하고 지낸 사이였다.

나는 잠깐 커피나 마시고 헤어지려 했지만 친구는 나를 보내주지 않았다. 친구의 고향인 파주에 처음 왔다는 것이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친구의 권유를 뿌리치기도 힘들어, 친구의 안내를 받아 파주관광을 하기로 했다. 통일전망대에서는 임진강 넘어 북한땅이 바로 보이고, 휴전선 바로 아래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있다는 사실을 선뜻 인정하기 힘들었다. 자운서원을 가보고 율곡 이이선생이 파주출신이고, 그의 무덤도 파주에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그런데 고교시절 친구들 중에는 함부로 고향을 들춰내지 않는 친구들이 있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당시에는 왜 그래야하는지 정확하게 이해는 못했다. 그 아이들의 고향을 언급하는 것은 마치 그들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나이였지만, 어른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역감정.’ 요즘 언론보도나 일상대화에서 거의 사라진 용어이다. 국민 다수가 영호남으로 나뉘어 서로 불신하고 대립하던 모습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부끄러운 추억으로 남은 듯 하다. 경상도와 전라도가 이웃사촌이라고 강조하던 가수 조용남의 유일한 히트곡 ‘화개장터’의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소위 ‘망국적 지역감정’은 영호남 주민들에 의해서 표출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정치인들이었다. 자기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억울하거나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선동했다. 지역간의 다양한 산업적, 문화적, 역사적 차이를, 차이가 아닌 차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차별들을 자기들이 해소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영호남간의 배타적이고 대립적인 ‘지역감정’이 사라졌다고 해서 지역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역감정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지역감정이란 인간에겐 생존본능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지역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자신의 일부로 만든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고향과 조국은 매우 소중하다. 애향심과 애국심 모두 일종의 지역감정인 것이다.

지역감정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은 자기 지역에 우호적 감정을 갖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고 조국이나 모국에 대한 자부심을 느낀다. 특히 고향이나 조국을 떠난 사람들에게 그러한 감정은 더욱 심한데, 자신의 일부가 분리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시민보다 LA교민이 더 애국심이 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역감정이 부정적으로 표출되는 경우도 있다. 자기의 지역과 다른 지역을 비교하여 우월감을 갖는 경우나, 다른 국가와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국가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경우이다.

올여름 기초의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의장단과 상임위원장이 바뀌었다. 그런데 의장단 구성을 두고 여러 지역에서 의원들 사이 갈등이 발생해, 기초의회가 마비되거나 파행을 겪었다. 그러다가도 의원들이 싸움을 멈추고 하나가 되는 경우가 있다. 시군통합이나 공공시설 유치를 두고 인근지역과 갈등이 생기는 경우다. 의정비 인상이나 해외관광연수로 비난받던 기초의원들도 이때가 되면 지역감정을 선동하며 지역사회의 투사로 변신한다.

‘영토수호’를 주장하며 갑자기 독도를 방문한 한국대통령과, ‘독도는 우리땅’을 일본말로 외치는 일본총리도 결국은 지역감정을 악용하는 것이다. 국민들이 갖고 있는 애국심을 이웃국가에 대한 배타적 애국심으로 호도해서 자신들의 빈약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전략이다. 지역감정을 악용하는 정치인들이 버티고 있는 이상, 평화로운 세계화나 다문화시대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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