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공부하는 분 중에 대농을 하는 분이 있다. 공부 끝나고 저녁식사를 하다가 대뜸 “선생님! 옥수수 심으셨어요?” 하는 것이었다.

여름이라 봄철에 심은 옥수수들이 이미 다 큰 상태였다. 그래서 올해는 이미 때가 지났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여름에 심어 가을에 따는 옥수수 종자가 있다했다. 당신 친구 분이 이 옥수수를 먹어 보더니 너무 맛있다며 씨앗을 달라고 해서 가져다주려던 참인데 남는 게 있으니 시험 삼아 심어 보라 권했다. 짙은 자주색이 나는 씨알이 잔 종류였다. 찰옥수수라 했다. 잘 마른 옥수수를 반으로 분질러 당시 자리에 같이 있던 한분과 나눠가지고 돌아왔다.

6월 말엽 씨앗을 뿌렸더니 처음에 잘 자랐다. 그러나 다 자랐을 때 평소에 보던 다른 집 옥수수 보다 키도 작고 왜소했다. 그 이유를 물어 보았더니 재래종이라서 그렇다 했다. 이십여 그루에 옥수수가 열렸다. 잘 기르면 두어 개씩 열린다는데 뭐가 부족해서인지 한 나무에 옥수수 한 개씩만 열렸다. 추석 무렵 어느 날 씨앗을 주었던 분이 “옥수수 따서 잡숴 보셨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추석 다음날 쉬고 싶어 하는 눈치인 집사람을 독촉하여 옥수수를 땄다. 옥수수수염이 완전히 마른 것과 반쯤 마른 것들을 땄다. 그런데 따놓은 옥수수 껍질을 까보니 두어 개만 자주색일 뿐 나머지는 하얀 것이었다. 너무 일찍 따버렸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미 따버린 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 아까운 것들을 어찌하나!’ ‘왜 더 신중하지 못했을까!’ 자책이 마음 가득 밀려들었다. 집사람은 그 옥수수를 현관 문 옆에 담아 놓았다. 드나들며 그 옥수수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빨리 쪄먹던지 해야지 저렇게 말리면 좋지 않을 텐데…!” 한마디 했으나 별 반응이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다 땄더라면 완전히 익은 걸 딸 수 있었을 텐데 그만 그걸 못 참고 덜 익은 걸 따버린 아쉬움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을 것 같다. 이 일로 인해 미숙(未熟)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옥수수 사건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수필가이신 지인이 내게 하는 말이 “책 너무 오래 끌지 마세요. 오래 본다고 다 좋은 글이 되는 것도 아닌데…” 하였다. 내가 쓰고 있는 이야기책이 2003년에 쓰기 시작하여 지금도 수정하고 있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2003년에 출간 여건만 되었다면 이미 출간되었을 책이다. 그런데 여건이 안 되어 놓아두었다가 2007년에 보았더니 미숙함이 많아 수정하였으나 또 여건이 안 되어 출간하지 못했다. 그걸 올해 출간하려고 읽어 보았더니 미숙함이 너무 많아 다시 수정작업을 하고 있다. 옥수수 사건을 겪고 나서 생각하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여건이 안 되어 출간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공자님은 3년 넘게 공부하는 사람이 없다고 개탄한바 있다. 공부가 무르익지 않았는데도 모두가 부귀공명만 쫒아가 버리는 미숙(未熟)이들에 대한 개탄이었다.

 그런데 돈이 된다하여 맛이 덜든 과일을 따서 파는 사람들이 많다. 덜 다듬어진 재능을 파는 사람들은 더 많다. 인격이 미숙한 사람들이 서로 잘났다고 다투는 세상에서 완숙(完熟)은 한낱 꿈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덜 익은 옥수수 따고 후회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2012.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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