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9일 충남 당진에서는 지역신문 지원조례 제정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당진 지역의 3개 주간지역신문사가 주최한 토론회였는데, 2시간 동안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자치단체가 지역신문에 예산지원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토론자 사이 찬성과 반대 의견이 팽팽했다. 영세한 지역신문이 지역사회를 위한 공익적 역할을 많이 하므로 지원해야한다는 의견과, 지역신문과 자치단체 사이의 독립성 훼손에 대한 우려가 함께 표출됐다.

시민단체 토론자 중 한 명은 사기업인 신문을 정부예산으로 지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기업과 정부를 구분하는 그의 발언을 들으면서, 필자는 지난 15년간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두 개의 파라다임, 즉 경제논리와 정치논리의 상호역학 관계를 돌아보게 되었다.

단순하고 명확한 경제논리에 비해 정치논리는 조금 복잡하고 불명확하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유권자의 선택도 결국은 경제적인 요인에 크게 영향을 받으므로, 정치논리도 경제논리에 종속된다고 주장한다. 유권자의 판단도 결국은 경제적 판단이라는 것이다. 정치논리는 민주화의 진행정도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 대한민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는 유권자가 정치논리의 주체이지만, 1당 체제인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1인체제인 북한에서는 김정은이 정치논리의 주체가 된다.

1960년대 이후 군사독재 치하에서 정부주도로 경제개발과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한국사회는 정치논리와 경제논리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정치논리는 의회민주주의를, 경제논리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쟁 원칙을 지향하며 상호 분리되기 시작하다, 1997년 IMF 경제위기를 맞으며 경제논리가 정치논리에 비해 우위에 서게 되었다. 시장경쟁을 통한 경제적 효율성 제고가 국가나 지역사회나 개인에게 가장 큰 이득이 된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었고, 정치논리는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인식이 고착되었다.

경제논리가 우세했다. 지난 15년간의 국가적 성적표는 복합적이다.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2700달러로, 세계 10위권의 무역국가가 되었고, 삼성 현대 등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정작 국민들은 궁핍하고 불안한 실정이다. 청년층, 중산층, 노인층 모두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경제논리를 적절히 견제하는 정치논리가 무기력해, 시장경쟁에서 도태되는 경제적 약자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미흡했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 등장한 ‘경제민주화’란 새로운 용어는 한국사회의 지배논리의 변화를 의미한다. 경제논리와 정치논리의 역학관계를 바꾸자는 데에는 여야후보 모두 동의했지만, 유권자들은 정치논리를 우위에 둔 문재인후보 대신, 경제논리와 정치논리를 동등하게 강조한 박근혜후보를 선택했다.

정치의 주된 기능 중 하나가 시장경제가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고, 정부의 주된 역할 중 하나가 기업을 지원하는 것이다. 박근혜정부가 새로 신설한다는 미래창조과학부도 결국은 사기업을 지원하는 정부조직이나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경제논리와 정치논리는 상호 결합될 수밖에 없다. 다만 정부의 지원이 소수 부유층이나 특권층에게만 돌아가지 않고 국민 다수에게 돌아가도록 정치논리가 조금 더 강화되길  유권자들은 바라고 있는 것이다. 

지역신문에 대한 정부지원도 소수 신문에 대한 특혜가 아니라, 다수 주민의 알 권리 신장에 기여하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장호순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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