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년의 신비를 간직한 채 우뚝 솟아 있는 장엄한 삼각산은 그 자체가 자연사 박물관이다.  북한산의 창조기원은 중생대말에 마그마가 주변의 암석을 뚫고 들어간 화강암이 지반의 상승과 침식작용으로 지표에 노출된 뒤 절리와 표면의 풍화작용으로 현재와 같이 산세가 험준하고 경사가 심한 암벽 봉우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북한산은 자연의 신비로운 자태와 영산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조들이 성을 쌓으며 각축을 벌였던 영욕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높이는 836.5?이다. 흔히 북한산과 삼각산을 각기 다른 산으로 알고 있는 경우 많다. 북한산은 일명 한산, 삼각산(三角山) 또는 화산이라 불렀으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 이라고도 하였다. 옛날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서 한양의 북한산을 바라보면 주봉인 백운대를 중심으로 북쪽에 인수봉 남쪽의 만경봉 세 봉우리가 삼각으로 나란히 우뚝 솟아 있어 삼각산이라 하였다한다.

 본래 북한산성은 백제가 하남위래성에 도읍할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개루왕 (5년) 132년 축성하고 근초고왕 26년(371)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전하며, 온조가 쌓은 옛 성터에 조선 숙종 37년(1711) 4월3일부터 3군문 즉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이 맡아서 축성을 시작하여 6개월만인 같은 해 10월19일에 1단계 성역을 완공 하였다. 북한산성의 성기(城基)는 총 연장12.7㎞ 달하는 체성(體城)과 여장(女墻), 14개의 성문(城門), 세곳의 장대(將臺), 143처의 성랑(城廊), 99개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
 북한산성행궁은 북한산성이 축성됨으로 영건된 만큼 산성이 완공된 후 성곽공사의 감독을 맡았던 김수항 등이 산성에 행궁을 지어야 한다고 주청(奏請)하여 1711년(숙종37) 8월에 행궁 터를 닦는 길일을 가리기로 하고, 책임자로 호조판서ㆍ공조판서를 당상으로 하여금 건사(乾事) 낭청(郎廳)을 뽑아서 일을 감독하게 하고 김수항ㆍ이언강을 북한행궁영건당상(北漢行宮營建堂上)으로 명호는 행궁영건청 이라하고, 1711(숙종37)년 8월에 착공하여 1712(숙종38)년 5월에 내전28칸, 외전28칸, 부속건물 등을 합해 124칸의 웅장한 규모로 행궁을 완성하였다. 또한 이듬해인 숙종 39년 상창, 중창, 하창, 호조창 등 140칸의 창고도 완공하였다. 숙종의 지대한 관심은 축조공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산성으로 거둥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북한산성이 축성된 다음해 4월 숙종은 북한산성을 시찰 하였는데, 대서문을 경유 수문을 구경하고 중흥사길로 들어서 자단봉에 올랐는데, 숙종은 그 때의 감격을 6수의 시로 남겼다. 그 후 1717(숙종43)년 숙종은 북한산성행궁에 직접 행행하여 유숙함으로서 지대한 관심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후 영조조 1760년8월(영조36)과 1772년(영조48)에 걸쳐 거동하였고, 대대적인 수리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북한산성 행궁이 지녔던 군사적 위치의 중요성을 짐작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왕들은 일상 머무는 법궁 외에도 지방 여러 곳에 행궁을 두고 행행 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행궁이란 왕이 궁을 떠나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무는 거처로 유궁이라고도 한다. 그 목적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지만 휴양목적의(온양)행궁, 능행을 위한(고양)행궁, 전란 및 재난을 대비한 피난성이 있는데, 북한산성 행궁은 피난성 행궁에 해당된다.

 이상과 같이 행궁의 규모에 대해서는 1745(영조 21)년 북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 이었던 승려 성능이 지은『북한지』궁전조에 내전28칸 외전28칸 그 부속 건물이 합해서 1백129칸으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훗날 증축된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산성 행궁은 영조 때 대대적인 수리가 있었고, 고종16년(1877)에 홍수로 개건(改建)했고, 1891년(고종30)에도 중수하는 등 구한말까지는 관리가 이루어져 온 것으로 파악 되고 있다. 그러나 1904  년 촬영된 사진의 모습에서는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1915년 8월 발생한 대홍수로 완전 파계 유실된 채 전현 관리보수가 이루어지지 않고 방치된 탓에 작은 골짜기가 물길을 형성 하고 좌ㆍ우로는 상면에서 흘러내린 토사가 덮여 흔적을 찾기 힘들다. 행궁지 전역을 관통하여 흐르는 계곡부의 물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행궁지를 발굴, 복원 보존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물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배수로 확보가 관건인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파괴 유실된 북한산성행궁은 앞으로 있을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 및 정비계획뿐만 아니라 관리계획까지 수립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되며, 현재진행중인 발굴조사는 고문헌을 통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북한산성의 축성과 함께 영건된 북한산성 행궁은 유사시에 도성을 버리지 않고 도성안의 많은 백성과 재산을 북한산성으로 옮겨 일치단결하여 고수한다는 강력한 호국의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북한산에 걸쳐있는 귀중한 문화재 북한산성과 행궁의 과거 화려하고 웅장했던 복원된 모습을 그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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