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국회에서 통과처리된 몇몇 법안에 대해 표결결과를 분석한 어느 언론보도를 보자면 자신이 속한 지역구의 실정에 따라 투표한 사람이 많아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각 지역과 각 분야의 민의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민의의 뜻에 따라 표를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당론투표를 여야의원 절반이 거부한 결과가 나온 것이 뉴스거리가 되는 것은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된 현실사회에서 당론 거부가 그나마 소신 있는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 것 때문일 것이다.

 때마침 일본에는 군국주의 정신을 이어받은 의원들이 무더기로 신사를 참배하고 자국의 안보를 스스로 지키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평화헌법을 개정해서 군대를 보유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들은 “침략의 정의는 국가와 국가의 관계,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아베의 말에서 보듯이 아전인수적 역사관을 소신으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중은 물론이고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그 잘못된 소신에 대해 지적하며 우려스런 눈으로 지켜보는 중이다.

 이런 소식을 접하며 소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신이란 자신이 믿고 주장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이에 따라 행동하기에 인간에게 있어 절대적 행동강령이 된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엔 소신에 따라 서슴없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신이란 각자 스스로의 인지작용을 통해 만들어낸 믿음이기에 각자가 가진 소신이 혹 옳은 소신일 수도 있지만 혹 그른 소신일 수도 있는 문제점이 있게 된다. 그 소신이 옳지 못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른 길에 몸을 바치는 결과가 나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신껏 주장하고 소신껏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옳은 소신을 갖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그렇다면 올바른 소신인지 그른 소신인지는 무엇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을까? 중용의 소신이 바로 그 기준이라 생각한다. 중용의 소신이란 늘 적중하는 것을 믿어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적중한다.’는 것은 어느 사안에 대해 편벽되지 않고 치우지지 않으며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바라보고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렇게 되려면 올바른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곧 기쁨 성냄 슬픔 즐거움 등에 휘둘리지 않고 본성에 소신의 뿌리를 두어 생각하고 행동하면 언제나 옳은 소신이 된다. 자신의 옳은 마음만 유지하면 되기에 누구나 중용의 소신을 가질 수 있다. 올바른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간직하는 일이니 이 보다 쉬운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쉬운 일을 내팽개치고 외물의 유혹에 빠져 그른 소신을 만든 뒤 그것이 옳은 양 행동하며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예부터 많았다. 그래서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사람마음은 위태롭고 도를 실행하는 마음은 미미하니 참 되고 한결같아야 진실로 그 적중함을 잡을 수 있다.”고 하였던 것이리라!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구하여 얻기 위해, 그 얻은 것을 지키기 위해 소신을 가지고 부단히 노력하며 사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석처럼 믿고 의지하는 자신의 소신이 혹 올바른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소신이 아닐 때 바로 불행을 낳는 악귀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당신의 소신은 당신을 행복을 낳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소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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