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병철 음악평론가 기획연재 문학과 음악의 만남<3> 헨릭 입센 / 에드바르드 그리그 <페르 귄트>

문학은 음악을 만나 또 하나의 새로운 예술형태로 태어납니다. 그리하여 자칫 잊혀져버릴 뻔했던 작품이 신선한 감동으로 되살아나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즉 문학과 음악의 만남이라는 매력적인 결합을 통해 우리는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만남의 감동을 음미하기 위하여 연재를 시작합니다. <필자주>

청징 명료한 대자연의 바람이 그리운 나라 노르웨이. 한때 바이킹의 돛배가 대서양 일대를 지배했던 그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민족적 친근감이 깃든 인물이 있다면 누가 뭐래 해도 페르 귄트(Per Gynt)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학으로, 그리고 음악으로, 이 민담 속의 인물은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영원한 미소와 그리움 같은 것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 에드바르드 그리그(Edvard Grieg)
노르웨이의 자랑 입센과 그리그
 이 인물을 노르웨이인들의 영원한 벗으로 함께 빛낸 두 사람은 극작가 헨릭 입센(Henryk Ibsen, 1828~1906)과 작곡가 에드바르드 그리그(Edvard Grieg, 1843~1907)다. 모두가 노르웨이 국민들에게 절대적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불멸의 예술가들이다. 특히 입센의 문체를 이루는 산문적 극시는 세계문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그를 근대 연극의 문을 연 위대한 공로자로 크게 기록하게 했다.

입센이 주로 다루었던 분야는 여성문제와 사회문제였다. 1879년에 발표한 그의 대표작 <인형의 집>은 이러한 문학정신과 사회 계도의 총체적 결산으로서, 노르웨이는 물론 19세기 말의 세계 사회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문제작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 하나의 작품만으로도 입센이 차지하고 있는 문학사의 위치는 크고 높아서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는 위명(威名)을 떨치기에 충분하다. <인형의 집>이 발표되기 12년 전인 1867년, 입센은 또 하나의 걸작을 발표한 바 있다. 그것이 그리그의 음악으로 유명한 <페르 귄트>다.

이 희곡에 등장하는 주인공 페르 귄트는 노르웨이에 실재했던 인물이다. 1732년에 태어나 53세로 죽은 페르가 그 모델인데, 그는 다양한 편력과 기이한 행동으로 신화나 전설처럼 채색되어져 내려오는 민담(民談)의 주인공이었다. 

입센이 페르에 대한 이야기를 채집한 것은 오슬로 북쪽 구드브란스달 지방을 여행할 때였다. 그가 이 지방을 여행하면서 들은 페르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로 말해서 바람 같은 사나이였다. 그는 명사수였고, 뛰어난 스키어였으며, 최고의 낚시꾼이었다. 게다가 허풍쟁이며 매력이 넘치는 레이디 킬러로서 희대의 바람둥이였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이곳저곳을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다가 멋지게 사라져버린 타고난 방랑객이기도 했다.
       
실존인물에서 소재를 취한 페르 귄트 
이 사나이의 이야기를 채집한 입센은 이상야릇한 매력을 느껴 그를 주인공으로 한 한편의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실재했던 인물 페르가 <페르 귄트>라는 희곡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입센의 희곡은 실제 인물과는 조금 다르게 그려져 있다. 우선 페르 귄트가 방랑했던 지역이 극에서처럼 세계 각국으로 확대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즉 페르는 일평생을 노르웨이 밖으로는 나가보지 못한 채 생애를 마감했지만, 입센은 페르를 세계 각국을 떠도는 방랑객으로 그려 놓고 있다. 그리고 실제의 인물이 독신으로 떠돌다가 죽은데 비하여 극중에서는 솔베이지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며, 결국 지친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와 솔베이지의 품에 안겨 조용히 눈을 감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그가 작곡한 극음악 중 여기서 불리는 노래가 모든 여성들의 심금을 울리는 그 유명한 <솔베이지의 노래>인데, 그 곡은 이 극음악을 더 한층 극적으로 결말짓는 자극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엄격히 말해서 이 노래는 페르 귄트가 귀향하기 직전, 그를 기다리는 솔베이지의 일편단심을 나타낸 것으로, 그리그가 만들어 낸 최고의 명 선율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 노랫말은 이렇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고, 또 봄이 오고 여름이 와도, 그래도 나는 기다리노라,
어느 날엔가는 기어이 돌아올 그대를 위해, 언제까지나 기다리마던 맹세를 지키면서......“
 
희곡 <페르 귄트>를 완성한 입센은 1874년 1월 그리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신의 연극을 상연할 때 극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연극에 음악을 붙여주도록 의뢰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극부수음악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15년의 나이 차가 나는 입센과 그리그는 1866년에 처음 만난 적이 있었다. 이때 입센은 <페르 귄트>를 집필 중이었고, 그 계획을 상의한 바 있었기 때문에 결코 뜻밖의 제의는 아니었다. 

그리그는 입센의 뜻에 동의하고 즉시 작곡에 착수했다. 이 때 그리그의 나이 30세, 입센은 45세였다. 이 무렵 그리그는 이미 피아노 협주곡 A단조를 작곡 발표하여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청년 작곡가로 확고한 명성을 얻고 있을 때였다. 그리그의 작곡은 다음해인 1875년 가을에 마무리 되었다. 음악은 연극의 진행에 따라 전 5부로 나뉘어 모두 23곡이 쓰여졌다.
         
▲ 헨릭 입센(Henryk Ibsen)
그리그의 극부수음악으로 다시 태어나   
이렇게 해서 입센의 연극 <페르 귄트>는 1876년 2월 24일, 오슬로의 크리스티나 극장에서 그리그의 음악과 함께 역사적인 초연의 무대를 가졌다. 이 연극이 올려 진 극장은 오늘날 노르웨이 국립극장이란 이름으로 오슬로 시내에 당당하고도 멋진 모습으로 건재하고 있으며, 그 정문 앞에는 원작자인 입센의 동상이 버티고 서있다. 오슬로를 찾는 모든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거쳐 가는 명소이기도 하다.

음악은 원작의 줄거리를 따라 극히 회화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장면 장면이 사실적으로 처리 되었고, 그에 힘입어 연극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그리그의 부수음악 역시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어 1877년 1월에 크리스티나 극장이 화재를 당하기까지 37회에 달하는 연속공연이 이루어졌다.

일단 극장에서 연극과 함께 성공을 거둔 <페르 귄트>의 음악은 그리그에 의하여 다시 연주회용 모음곡(組曲)으로 정리되어 발표 되었다. 1888년에 제1 모음곡, 1891년에 제2 모음곡이 발표됨으로써 이후부터는 극음악으로서가 아니라 연주회용 모음곡으로서 음악애호가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극부수음악 <페르 귄트>는 그리그를 대표하는 관현악곡으로 정착되었고, 지금도 연극이 아닌 음악으로 <페르 귄트>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 생명력은 이처럼 위력적이다. 만약 입센이 희곡을 쓰지 않았고, 그리그가 작곡을 하지 않았더라면 노르웨이 어느 산촌의 민간 설화로 밖에 살아 있지 못할 페르가 세계 만민의 사랑스러운 친구로 환생하여 함께 숨 쉬고 있지는 못했으리라. 노르웨이 정부에서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수도인 오슬로의 앙케브뤼아 다리 끝에 페르 귄트의 기념상을 건립, 모든 시민들로 하여금 가슴에 새기도록 배려해 놓고 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스페인 민중의 마음속에 살아 있듯, 입센의 <페르 귄트>도 노르웨이 민중의 마음속에 영원한 반려자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 아름다운 그리그의 멋진 선율과 함께.
 
음악평론가 선병철 sunclassic@hanmail.net
문의 011-254-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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