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병철 음악평론가 기획연재 문학과 음악의 만남<6> 셰익스피어 /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

무더위가 절정으로 달려가고 있다. 지구 온난화에 따른 여름 날씨의 확장은 6월에 시작하여 9월까지 그 위세를 떨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한여름’이라는 개념이 일찍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여름이라는 개념이 우리나라와 유럽이 같지 않다는 것을 미리 알고서 독자들께서는 이 글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즉 우리나라의 한여름은 날씨가 가장 무더운 피크 타임을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유럽의 한여름(Midsummer)은 그렇지가 않다. 가장 더운 때가 아니라 낮의 길이가 가장 길 때, 즉 하지(夏至) 전후를 가리키는 말이다.

17세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은 신화의 세계

▲ 멘델스존
  이 무렵이 되면 아테네의 뒷산에서 성 요한 축제가 벌어지고, 그 틈을 이용하여 갖가지 요정들의 사랑의 축제가 벌어진다. 이러한 신화와 전설에 기초하여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이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이다. 요정들의 수장인 오베론을 중심으로 환상과 유머로 가득 찬 5막 짜리 드라마인데, 그의 4대 비극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사랑을 받고 있는 유쾌하고 발랄한 한바탕의 소동이다. 서로 사랑하고 있는 두 쌍의 연인들이 벌이는 사랑 놀음, 그것이 이 드라마의 중심축이 되어 이리저리 뒤섞이지만, 결과적으로 두 쌍의 합동결혼식으로 마무리를 짓게 되면서 해피엔딩 한다. 흥겹고 행복한 여운이 무더운 한여름 밤을 식혀주는 청량제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멘델스존이 이 문학작품을 처음으로 읽은 것은 그의 나이 17세 때인 1826년이었다. 영어에 능통하지 못했던 멘델스존이었기 때문에 슐레겔이 번역한 독일어판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처음 대하면서 그는 기묘한 환상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17세 소년기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멘델스존이었지만, 그는 이미 14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었고, 15세 때에는 최초의 교향곡을 발표하여 조숙한 천재성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음악가적 기질의 급 성장기에 셰익스피어로부터 받은 신선한 자극은 그로 하여금 매력적인 음악 창작에 몰두하도록 이끌어 갔던 것이다.

   멘델스존은 <한여름 밤의 꿈>에서 읽은 그 환상적인 분위기를 음악으로 그려내는 작업에 즉시 착수했다. 원래가 뛰어난 음악적 묘사력을 지닌 멘델스존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물이나 동기가 그를 자극할 때에는 그것을 음화(音畵)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뒷날 위대한 악극의 천재로 유럽 음악계를 장악하고 있던 바그너가 그를 가리켜 아무도 따를 수 없는 천재적인 ‘소리의 풍경화가’라고 극찬한 것도 멘델스존의 감탄할 만한 음악적 묘사력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멘델스존이 처음에 이 작품을 음악으로 작곡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오늘날과 같은 극부수음악 전곡이 아니라 ‘서곡’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도 오케스트라용이 아닌 4손을 위한 피아노 연탄용이었다. 피아노용 서곡은 1826년 8월 6일에 작곡 완료되어 그의 선생인 모셀레스 앞에서 시연(試演)되었다. 모셀레스는 멘델스존의 작품에 대하여 놀라운 상상력의 발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 자극 받은 멘델스존은 즉시 관현악으로 연주하기 위한 편곡에 착수하여 지금과 같은 오케스트라용 서곡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서곡은 1827년 2월, 멘델스존의 자택에서 열린 가정연주회에서 사적으로 초연되었고, 이어서 카를 뢰베의 지휘로 공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1829년 런던에서 성 요한 축제행사가 열렸을 때에도 연주되어 대단한 환호를 받았다.

본격적인 극부수음악으로의 재탄생
  이렇게 해서 17세의 멘델스존은 이 서곡 하나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소년기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음악창작의 성숙기로 접어들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그가 지금과 같은 <한여름 밤의 꿈> 전 12곡을 작곡한 것은 서곡이 쓰인 지 17년이 지난 1843년이다. 17세에 최초로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읽고 거기에 서곡을 붙인 지 다시 17년이 흐른 뒤에 멘델스존은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가장 화려한 존재로 우뚝 서서 그 명성을 유럽 천지에 드높이고 있었던 것이다.

   멘델스존이 다시 <한여름 밤의 꿈>과 만나게 된 계기는 당시 프로이센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권유 때문이었다. 국왕은 멘델스존에게 포츠담 궁정극장에서 상연할 3편의 연극을 위해 극부수음악을 작곡해줄 것을 요청했던 바, 그 연극 중의 하나가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국왕으로부터 작곡의뢰를 받은 멘델스존은 즉시 작곡에 착수하여 한 달 만에 전 12곡으로 구성된 극부수음악을 완성했다. 완성된 극음악은 17년 전에 쓴 서곡과 함께 1842년 10월 14일 포츠담 왕실극장에서 연극의 진행에 따라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한여름 밤의 꿈>은 셰익스피어의 문학과 멘델스존의 음악이 만나 어우러진 즐겁고 유쾌한 무대음악으로 다시 태어났다. 거기에는 넘치는 판타지아의 선율들이 현실과 교차되어 흐름으로써 결이 고운 꿈결처럼 흐물거리고 있다. 특히 제5막에 나오는 ‘결혼행진곡’은 피아노곡으로 편곡되어 지금도 전 세계의 결혼식장에서 신랑신부가 새 인생을 출발하는 행진의 음악으로 연주되고 있다. 트럼펫으로 시작하는 장엄하고도 힘찬 테마의 반복은 신랑 신부의 결혼축하 음악으로 꼭 알맞다.

   셰익스피어의 풍부한 상상력이 빚어낸 문학, 여기에 멘델스존의 감각적인 명 선율들이 함께 어우러져 빚어내고 있는 절묘한 분위기로 인하여 실로 꿈결 같은 즐거움을 안겨준다. 그것은 천성의 로맨티스트인 멘델스존이 펼쳐 놓은 현실과 환상의 일대 파노라마이기도 하다. 전곡에 나타나는 몽환적인 아름다움이야말로 멘델스존의 음악적 특성을 총체적으로 집약시킨 한바탕의 잔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멘델스존은 이 명랑 쾌활한 음악을 완성한 뒤 1847년 5월 17일, 라이프치히 자택에서 심장장애를 일으켜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라이프치히에서 베를린으로 옮겨져 베를린 유태인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만약 그가 10여 년만 더 살았더라도 19세기 낭만음악사는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음악평론가 선병철 sunclassi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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