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이리예술마을의 명물인 백순실미술관 외관. 수령 100년된 참나무가 병이 나 막혀있던 벽면을 터서 미술관 메인 출입구로 만들었다.

건물 벽을 뚫고나온 나뭇가지. 파주 헤이리예술마을의 명소 백순실미술관(BSSM, 옛 금산미술관)은 건물의 독특한 외관으로도 유명하다. 건축 당시 건물 안에 있던 아름드리 나무를 베는 대신 건물 벽을 뚫어 나뭇가지가 밖으로 뻗어나가게 한 것. 최근엔 아예 나무쪽으로 미술관 입구를 새로 냈다. 나무의 숨통이 그만큼 더 트인 셈이다. 8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이젠 나무를 품은 미술관인지, 나무의 품에 안긴 미술관인지 경계가 없어졌다. 건축과 자연, 그리고 예술의 공존. 미술관의 방향성이 읽히는 풍경이다.

차와 나무, 자연에서 가져온 예술
백순실미술관은 ‘느린 미술관’이다. 전시 기획부터 작가 선정, 작가와의 소통, 전시 기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느긋하게 이뤄진다. 예술에까지 부는 속도전에서 비껴 섰다. 개관전인 ‘토포필리아 : 장소의 시학’은 미술관의 이러한 성격과 현재, 나아갈 미래를 함축해 담은 전시다.
토포필리아는 환경, 장소에 대한 정서적 유대를 뜻하는 신조어. 자연환경을 작업 소재로 삼아온 백순실, 나점수 두 작가가 환경, 공간을 마주하면서 얻은 경험과 정서, 그것들과 관계하는 태도에 주목한 전시다.
백 작가는 우리 차에 천착한 ‘동다송(東茶頌)’ 연작으로 잘 알려진 중견작가. 매일 마시는 찻잎과 커피 찌꺼기를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그림 재료로 쓴다. 이번 전시에서도 커피물을 여러 차례 입히고 말린 캔버스 천에 화산석으로 거친 느낌을 준 작품을 걸었다. 커피물로 켜켜이 쌓아올려 시간의 흔적이 밴 색감에선 흙내음이 난다. 그 위에 지극히 절제된 양식으로 표현한 식물들에서는 차분하지만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백 작가가 우리 주변에 흔한 자연에 눈을 돌렸다면, 나 작가의 시선은 좀 더 멀리 가 있다. 그는 사막 여행 중 만난 식물에서 얻은 영감을 수직과 수평적 이미지로 작업했다. 재료는 대개 거친 결을 그대로 드러낸 나무다. 전시장에 서 있거나 누워 있는 그의 작품은 침잠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두 작가의 작품은 서로 다른 듯 닮았다. 평면과 입체, 푸근함과 적막감으로 대비되다가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작품과 공간을 음미하라고 입을 모아 속삭인다.

▲ 개관전 '토포필리아'에 전시된 백순실 작가의 평면회화와 나점수 작가의 조각 작품 / 전시 내용을 설명 중인 김은영 학예연구실장.

또 하나의 작품, 공간
이번 개관전은 본격적인 준비에만 6개월이 걸렸다. 작품이 어디에 어떻게 걸리고 놓일지를 논의하는 데 적잖은 시간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전시장은 여느 미술관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전시장 중간에 턱하니 계단이 있다. 굴참나무가 버티고 있는 한쪽 면도 염두에 둬야 했다. 정형화된 전시 공간이 아니어서 작가에게 곤혹스러울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색다른 시도를 해보는 기회도 된다. 작가마다의 공간 탐색과 해석이 이곳에서는 또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전시 공간은 4곳. 두 작가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공간과 각각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따로 뒀다. 나 작가는 공간에 맞는 신작도 선보였다. 마땅한 전시공간을 찾지 못해 15년째 지니고만 있던 고목이 이번에야 생명을 얻었다.

 

긴 호흡으로 속도 거스르기
이번 전시는 8월 11일까지 3개월간 이어진다. 개관전이라 특별히 배려한 건 아니다. 앞으로도 연 3회 기획전시라는 느린 호흡으로 전시에 철학을 담고 작가와의 밀도 높은 소통을 해나갈 계획이다. 과정을 중시하는 전시를 만들겠다는 취지다. 스포츠카와 오토바이를 등장시켜 ‘이미지의 속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가, 대형 세라믹 설치작업을 하는 작가, 무형의 소리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가들의 전시가 예정돼 있다.
김은영 학예연구실장은 “재료에 대한 실험, 공간 탐구, 타 장르와의 소통 등 특성화된 주제로 현대미술을 해석하는 작은 미술관이 될 것”이라며 “신진작가의 성장을 돕고, 중견작가를 재조명하는 전시를 기획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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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시간 오전 11~오후 6시(월요일 휴관)
입장료 2,000원 문의 031-944-6324
위치 파주시 법흥리 헤이리예술마을 165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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