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병철 음악평론가 기획연재 문학과 음악의 만남<7> 빌헬름 뮐러 / 프란츠 슈베르트 <보리수>

문학작품이 반드시 거창하거나 위압적인 길이와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만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주 미미한 몇 줄의 시편만으로도 거작(巨作)에 못지않게 심금을 울리기도 한다. 이럴 경우 대개는 문학 그 자체 만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거기에 또 다른 예술적 요인이 결합 될 때에 비로소 미처 피어나지 못했던 향기가 발산된다. 특히 음악이라는 소리의 예술이 그 문학과 결합될 때에 거기서 발효되는 영롱한 취기(醉氣)는 우리를 전혀 새로운 체험의 세계로 인도하기도 한다. 그것이 문학과 음악이 만나 발산하는 또 다른 예술의 향기다. 

고독한 사랑의 방랑자 빌헬름 뮐러
예컨대 베토벤의 저 유명한 제9교향곡 끝악장에서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노랫말의 원작자가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라는 독일고전주의 시대의 시인이자 극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듣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가 않다. 해마다 연말이면 송년음악회의 프로그램으로 어김없이 등장하여 대합창의 물결에 휩싸이면서도, 그 노랫말의 시를 쓴 원작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게 우리의 일반적인 습관이다. 실러의 시가 없이 어찌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학창시절부터 애창곡으로 널리 불러온 ‘보리수’라는 독일 가곡도 마찬가지다. 가슴에 스며드는 이 가곡을 부르노라면 누구나 슈베르트라는 절세의 가곡 작곡가를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 가곡에 대한 연상 작용은 끝나버리기가 십상이다. 좀 더 발전하여 ‘보리수‘라는 가곡의 바탕을 이루는 시는 누구의 작품이며, 또 이 노래가 어떻게 탄생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 밖인 것이다. 그러나 한 번쯤 이 애틋한 사랑의 아픔을 노래한 시인과 작곡가에 대해서 좀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가곡 ‘보리수’를 정확히 이해하고 부르는 지름길이 될 것임은 물론이다.

독일가곡(Lied) ‘보리수’는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 음악의 총체적인 아름다움을 끌어안고 있는 연가곡집 <겨울나그네> 가운데 다섯 번째 곡이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등이 독일 가곡의 선구자로서 좋은 예술가곡을 남기기는 했지만 그 진정한 출발점은 슈베르트의 탄생으로 가능했다. 슈베르트는 31세라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무려 600여 곡에 달하는 가곡을 남겨 세계음악사에 ‘가곡의 왕’이라는 영광을 안고 있는 작곡가다. 그 많은 가곡들 중에서도 단연코 최고의 정점에 선 작품이 <겨울나그네>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곡이 ‘보리수’다.

연가곡은 특정한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그것을 여러 개의 노래로 엮어서 풀어나가는 일종의 노래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슈베르트는 <겨울나그네>를 쓰기 전에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라는 연가곡집을 발표하여 이 분야의 개척자적인 역할을 감당했는데, 이 두 연가곡집의 원작자는 빌헬름 뮐러(Wilhelm Muller, 1794-1827)라는 독일 낭만파 서정 시인이다.

뮐러는 33세의 나이에 요절한 시인으로 당시에는 널리 읽혀졌지만, 해가 갈수록 그의 위치는 문학사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라는 뛰어난 가곡 작곡가가 나타나 그의 연작시들을 연가곡집이라는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함으로써 예술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만약 슈베르트가 이 두 연가곡집을 작곡하지 않았더라면 뮐러라는 이름은 독일 안에서나 가끔씩 기억되는 시인으로 남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뮐러는 동부 독일 데사우에서 태어나 베를린 대학을 졸업한 독일 낭만파 초기의 서정 시인이다. 그가 베를린 대학에 다닐 때 알게 된 17세의 소녀 루이제 헨젤은 연작시 <겨울나그네>를 쓰게 한 직접적인 동기를 제공해준 여인이다. 그런데 이 연작시의 원제목은 <겨울나그네>가 아니라 <겨울여행, Winterreise>이다. 일본에서 번역하여 우리나라에 소개될 때 <겨울나그네>가 되었지만, 작품의 전체 내용을 볼 때 <겨울나그네>가 오히려 원시(原詩)의 분위기에 더 가깝다.

뮐러는 이 소녀를 지극히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정다감한 청년시인 뮐러의 실연은 겨울벌판을 헤매는 한 남자의 고독과 절망으로 이어져 결국 이 연작시를 낳게 한 것이다. 뮐러가 쓴 연작시 <겨울나그네> 중 가장 유명한 제5곡 ‘보리수’의 실제 모델은 중부독일 헤센 주의 바트 조덴 알렌도르프라는 마을에 지금도 뮐러가 찾아가 보았던 당신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상심한 뮐러가 이 마을을 지나간 것은 1823년이었다. 그는 이 때 마을 성문 앞 우물곁에 서있는 해묵은 보리수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잠시 쉬면서 이 시를 썼다. 연작시 <겨울나그네> 전편이 완성 된 것도 바로 그 해인 1823년이다.

슈베르트의 불멸의 가곡으로 다시 태어나
슈베르트가 이 시집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4년 후인 1827년이다. 이 해에 시인 뮐러는 33년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악성 베토벤이 57세로 그 영웅적인 생애에 종지부를 찍고 죽음의 길로 떠난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슈베르트는 31년의 고독한 방랑자 생활을 마치기 1년 전이다.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가 이 시를 우연히 읽은 슈베르트는 곧 그 시를 연가곡으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렇게 해서 슈베르트는 단숨에 24편의 연가곡집 <겨울나그네>를 완성했다. 전작인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보다 훨씬 더 농도 짙은 단조적 우수가 밑바탕에 깔려 있어서 연주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회색 빛 그을림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렵다. 제5곡 ‘보리수’에 이어지는 제6곡 ‘홍수’에 이르면 그 감도는 절정에 이르면서 끝 곡인 ‘거리의 노 악사’까지 이어진다.

시인의 실연이 아프게 각인된 ‘보리수’는 시가 쓰인 지 4년 만에 슈베르트의 가곡으로 다시 태어나 세계 각국의 젊은 연인들을 울려주면서 영원한 애창곡으로 사랑 받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이 가곡이 이처럼 사랑을 받기까지에는 가곡의 천재 슈베르트의 선율과 뮐러의 애틋한 연심(戀心)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임을 깊이 음미해보았으면 한다. 여름이 한창인 지금, 시절을 앞당겨 겨울벌판을 헤매는 시인의 마음과 작곡자의 마음을 미리 음미해보는 것도 피서의 한 가지 방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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